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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김의 전쟁

Posted March. 27, 2010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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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야쿠자를 살해한 뒤 무기수로 복역하다 영구 귀국한 권희로 씨가 26일 오전 6시 50분경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이날은 그가 살아생전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결행한 하얼빈()역 현장을 둘러보고 헌화도 하고 싶다고 했던 안 의사 순국 100주기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의 인생역정은 한일 간 질곡의 역사만큼 파란만장했다.

야쿠자에 총구 들이댔던 사건은?

권 씨를 일본 사법사상 최장기 복역수로 만든 사건은 살인과 인질극이었다. 이 사건은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이 단초가 됐다. 김 씨는 1968년 2월 20일 채권자의 부탁으로 빚 독촉을 하던 일본 폭력배 2명을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의 클럽 밍크스에서 엽총으로 사살했다. 폭력배가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하자 격분한 것.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권 씨는 실탄과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차량을 이용해 도주했다. 시즈오카 현 혼카와네()의 한 온천여관에 들어간 그는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다 체포됐다. 1972년 1심, 1974년 2심을 거쳐 1975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권 씨는 인질극을 벌이면서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경찰관의 차별적 태도를 성토하고 경찰고위층의 사죄와 해당 경찰관의 파면을 요구했다. 인질극을 지켜보던 어머니 박득숙 씨(1998년 작고)는 아들에게 한복 한 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며 자신도 비장한 각오를 보인 바 있다.

생전 어머니 묘소에 절 올리고 싶다

권 씨는 1928년 11월 일본 시즈오카 현 시미즈 시에서 권명술 씨와 박득숙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 씨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재혼했다. 이때 새아버지의 성을 따 김희로로 바뀌었다. 의붓아버지의 구박에 견디다 못해 열세 살 때 가출했다. 일본 사회로부터 천대를 받다보니 형무소를 들락거리며 청춘을 보냈다. 결혼에도, 사업에도 잇따라 실패했다. 일본인에게서 빌린 돈이 무기수로 장기 복역하게 된 화근이었다.

그는 1999년 9월 귀국하기까지 총 3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런 권 씨의 기구한 삶은 1992년 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대 후반 부산 자비사 박삼중 스님과 재일동포 실업가 조만길 씨 등을 중심으로 권 씨 가석방 운동이 시작됐다. 박삼중 스님 등은 한국인 10만 명이 서명한 석방탄원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이런 구명운동 덕분에 1999년 9월 7일 일본에 다시 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가석방돼 영구 귀국했다.

한국 땅을 밟은 권 씨는 박삼중 스님 등 후원인들의 도움으로 부산 연제구 거제동 한 아파트에 정착해 사회활동을 했다. 1979년 일본에서 옥중 결혼했던 한 여인과 함께 가정을 꾸려 안정된 노년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여인이 돈을 갖고 달아나면서 다른 여인과의 관계 등으로 형사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지병인 전립샘암이 악화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이달 초 일본 언론에 죽기 전에 어머니의 묘에 절을 올리고 싶다며 일본 입국을 희망했다.

권 씨는 최근 자신의 석방운동을 주도한 박삼중 스님에게 스님 덕분에 형무소에서 죽을 사람이 아버지 나라에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게 됐다면서 시신을 화장해 유골의 반은 선친의 고향인 부산 영도 앞바다에, 반은 시즈오카 현 어머니 묘 옆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시신은 28일 오전 8시 반 발인에 이어 부산영락공원에서 화장된다. 유골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처리될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부산 동래구 봉생병원에 마련됐다. 051-531-7100



조용휘 sile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