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영의 대가 지금도 역사적 마찰은 계속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한 때 식민지였던 한국을 비롯하여, 이웃 나라들과의 국교 정상화는 외교 과제로 남아 있다. 제9장에서는 ()에서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다루고, ()에서는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다루기로 한다.
지난2월 25일 한국은 이명박 씨( . 66)가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현대 건설 사장을 거쳐 서울 시장으로 된 그는첫 CEO(최고 경영 책임자) 출신 대통령으로서, 국민들로부터 경제 재생에 대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성숙한 한일 관계를 위해서는 사죄하라, 반성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토론하면 된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자주 외교 문제의 쟁점이 되는 식민지 지배를 둘러싼 역사 인식에 대해서, 이 대통령이 당선 된 뒤에 한 말이다. 일본에게 쓴 소리를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달라서, 일본에서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40여 년 전, 명문 사립대인 고려대 학생 시절 반일 운동의 투사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데모에 참가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불과 수억 달러로 식민지를 청산 / 한국 학생들 굴욕스럽다
1964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서 학생과 시민 수 만 명이 모여, 박 정권은 민족을 위해 물러나라, 부패하고 무능한 박 정권 타도라고 외치며 데모를 했다. 바로 전 해에 대통령 선거에서 갓 군복을 벗은 박정희() 대통령은 데모가국교 정상화 반대에서 반정부로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력으로 데모를 진압했다.
왜 학생들과 시민들은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는가.
그 당시, 서울 대학교의 리더였던 현승일() 국민 대학교 전 총장(66)을 만나 보았다.
불과 수억 달러로, 과거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한다 하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굴욕 외교의 극치였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20년이 채 못 되었다. 누구에게나 괴로웠던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머리속에 남아 있었다. 이런 내용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민족적인 감정이었지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 출신의 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도 심했다. 1960년 4월, 독재체제를 강화해 온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에 의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여년 후 쿠데타가 일어났다. 박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이란 외국 세력들을 등에 업고, 권력 기반을 다지려 했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를 팔려고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숭실대에서 반대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유영렬() 씨(67)는 현재, 국사 편찬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교가 정상화되면, 일본 기업들에 의해 한국 경제는 수탈되고 만다. 한국 전쟁으로 부흥을 이룬 일본의 거대한 경제력 앞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현 교수와 유 위원장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일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동료들 중에서 한일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이는 소수파라고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견해도 바뀌었다. 내란죄로 체포된 현 교수는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서 대학 교수가 되었다.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도 되었다.
지금은 박 대통령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다. 독재였지만 장점도 있었지요. 경제 성장을 보고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 건설에 입사하여, 비즈니스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35세에 사장이 되었다. 현 교수는 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도 과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겠지요라고 말한다.
한편, 유 위원장은 학생 운동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한국 민주주의의 맹아를 찾기 위해 역사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도1년 반 동안 연구를 위해 체재했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인들의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를 접하면서 일본에 대한 견해도 바뀌었습니다. 국교 정상화 내용은 문제가 있었지만, 국교를 맺은 것은 결과적으로 잘 됐다고 얘기한다. 양국은 숙명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이웃 나라다.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해 보다 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국교 정상화 때에 부족했던 것들을 어떻게 보충해 나갈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학생들은 석방이 되자마자 소속 대학에 관계없이 63 동지회를 만들었다. 63이란, 대규모 데모가 있었던 6월 3일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도 그 결속은 변함없이 강하다. 서울 시내에 있는 사무소를 방문했더니 경찰들과 충돌하고 있는 학생들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는 동지인 이명박 씨를 열심히 응원했습니다라고 사무실 관계자가 말했다.
남쪽(한국)만으로 좋은가/ 일본 학생들도 반발
1965년 6월 22일.
14년에 걸친 교섭의 종지부를 찍었다. 국교 정상화를 골자로 하는 한일 기본 조약과 4개 협정이 조인되었다.
한일 관계를 한 단계 더 높이 승화시킨 것은, 1998년 10월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渕恵) 수상과의 정상회담이었다. 오부치 수상은 과거를 성의 있게 사죄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일본의 발전을 솔직하게 평가했다. 역사 이해의 중요함을 서로 확인했다.
다음 달, 가고시마(児)에서 한일 장관 간담회가 열렸으며, 김종필() 국무총리(82)가 일본을 방문했다. 김 국무총리는 일찍이 중앙정보부(KCIA) 부장으로서, 이케다 하야토() 일본 내각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들과 교섭을 했었다. 김•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지불로 청구권 문제의 결착을 본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다.
김 국무총리는 귀국 길에 본인의 희망에 따라, 후쿠오카시()의 규슈()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이라는 국가 만들기에 많은 도움을 준 규슈() 대학의 출신자들의 은공에 대한 보답 차원의 이례적인 강연이었다. 일본어 강연은 45분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국교가 없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한일 양국 관계뿐 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체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교 정상화를 위해 나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당시 강연을 실현시키기 위해 운영을 맡고 있던 법학부장이었던 이시카와 쇼지() 교수(63)를 만나기 위해, 규슈() 대학을 방문했다.
아무리 한 나라 국무총리의 희망이라 할지라도, 그가 한국 정치에 끼친 역할을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는 갈등이 없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시카와()교수는 사가() 대학 학창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운동을 했었다.
또 다시 일본 자본이 식민지였던 이웃 나라에게 마수를 뻗치고 있다. 제국주의의 부활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은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던 일본 지배층이, 미국과의 종속적인 동맹 관계 하에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을 특별히 지원하므로써, 스스로의 연명도 꾀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이 남쪽하고만 손을 잡아도 되는가. 뭐, 그런 생각들을 했었지요.
그것은 그 당시 많은 학생들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상을 추구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으로 건너간 아는 재일 조선인 학생도 있었다. 독재로 민중을 괴롭히는 남쪽보다는 북쪽에 여러 가지 문제는 있다고 할지언정, 그 당시 자주성과 정통성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82)은 박 정권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정권이다. 뒤에서 미국이 빨리 일본과 정상화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 노릇이다"라며 매일같이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의 반대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냉전 하,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 경제를 최우선시하는 박 정권
한일 조약에 관한 안건은 1965년 11월, 일본 중의원 본 회의에서 의장의 발의로 불시에 가결되었다. 다음 달 참의원에서도 사회당, 공명당, 공산당 등의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가결되었다.
국교 정상화는 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동아일보의 도쿄 특파원으로서 국교 정상화를 취재한 권오기(. 75) 동아일보 전 사장은 말한다.
세 얼굴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이웃 나라들이 식민지 시대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거기에 냉전을 둘러싼 미국의 속셈,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던 박 대통령의 의도가 함께 작용한 것이지요. 이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한일 관계는 이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한일 교섭 연구의 제 일인자인 이원덕() 국민대 교수(45)에게도 물어 보았다.
이 교수는 교섭을 타결로 이끈 원동력을 두 가지로 들었다. 우선, 안보라는 논리이다. 미국이 냉전 체제 하에서 효과적으로 공산권을 봉쇄하기 위해서,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을 정치와 경제적으로 묶으려고 했다.
1961년에는 북조선(북한)이 중국, 소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의 본격화와, 중국의 핵실험 성공(64년 10월)으로, 일본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압력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경제 논리였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점차 줄이는 대신 그것을 일본에게 떠맡기려 했지요. 경제 개발을 최우선으로 삼는 박 정권은 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한일협정 교섭을 타결하여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섭은 급진적으로 진전되었다.
본래의 테마였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은 온데 간데없어져 버렸고, 이는 훗날 거듭되는 역사적 마찰의 원점이 되었다고 했다.
다만, 그 당시 한국 측이 식민지 지배 청산을 철저하게 주장했다면, 한국의 지금의 번영은 있을 수 있었을까요? 역사는 다양한 측면에서 봐야 합니다.
규슈() 대학에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강연을 계기로 한국 연구 센터가 만들어졌다. 유럽 정치사가 전문인 이시카와 교수였지만 초대 센터장을 맡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인 과제이었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시카와 교수는 당시의 반대 논리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자세는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보려는 태도가 아니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미일 동맹에 의지해 갈 것인가, 다양한 아시아에서 어떻게 주체적으로 공생의 길을 모색할 것인지, 일본은 바로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자면,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일본은 북조선(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상화해 나갈 것인가라는 어렵고 중대한 테마가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고스게 고이치()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은 1951년 예비회담을 거쳐 1952년, 제1차 본 회담이 시작되었다. 제7차 회담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일본 측에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1953년 구보타() 발언등)도 있고 해서, 결렬과 긴 정체를 피할 수가 없었다.
1965년 6월 22일, 국교 수립 관계를 맺는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 조약)과,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의 4 협정이 도쿄()에서 조인되어, 기본 조약은 같은 해 12월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단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다케시마(), (한국명 독도)에 관한 문제는 보류되었다. 한국 측은 다케시마는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의 대상도 안 된다고 보고 있다.
키워드한일 기본 조약
식민지 지배 등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으로 인해, 기본 조약에는 애매한 표현이 남아 있다.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한국 병합 조약 체결일) 이전에 맺은 조약과 협정은 이미 (영문서에는 already)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병합 조약과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은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에 대해서 한국 측은 일본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강요 당한 것으로 애초부터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체결 자체는 합법이며,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계기로 무효가 되었다는 입장을 취했다. 기본 조약은 무효의 시점에 대한 언급을 피했던 것이다.
제3조에서는 한국 정부를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한국의 관할권에 대한 범위를, 일본은 한국과 북한의 군사 경계선의 이남이라고 해석했고, 한국은 한반도 전체라고 주장했다.
키워드북일 교섭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郎) 수상과 김정일 총서기가 맺은 북일 평양 선언에서, 일본 측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뼈아픈 반성과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를 표명했다라고 한다. 청산문제에 있어 평양 선언은 국교 정상화 이후에 일본이 무상, 유상, 인도적인 지원에서의 경제 협력을 실시한다고 하여, 한일 간의 기본적인 방법이 다시 쓰였다. 청구권 포기 원칙도 확인되었지만, 북한 측은 징용으로 인한 피해와 위안부 문제 등은 별도 문제로 다룬다는 입장이다.
키워드청구권・ 경제협력 협정
협정에서 일본이 한국에게 3억 달러를 무상으로 공여하고, 2억 달러는 빌려줄 것을 약속했다. 모두 10년 간에 걸쳐, 일본의 생산물과 일본인의 역무를 제공한다는 내용으로, 포항 제철(지금의 POSCO)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 고속도로, 소양강 댐 건설 등에 쓰였다.
협정은, 한일 간의 재산과 권리 등의 청구권에 대해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라고 명기했다. 일본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징용과 징병 등의 개인 보상에 관한 일은, 한국 측에 맡기고 경제 협력으로써청산을 대신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 후에야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박 정권은 1970년대에 들어와,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에 관한 국내법을 만들었다. 강제 동원으로 사망한 약 8500명의 유가족에게 30만원씩을 지불하기도 했지만, 피해자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의 재검토를 내건 노무현 정권은 일본에 의한 강제 동원 실태 조사를 하여, 2007년 사망자에게 2000만원 (약 230만 엔) 등을 지급하는 법률을 성립시켰다. 일제 강점하의 강제 동원 피해 진상 규명 위원회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22만 건의 피해 신청이 있었고, 사망자 1만 1442건, 행방불명 625건, 부상 1237건 등의 피해가 인정되었다.
메모 김종필1926~
한국의 군인, 정치가. 한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박정희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 대통령 아래에서, 중앙정보부(KCIA) 초대 부장으로서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 관여했다. 1971년부터 국무총리를 맡았고, 1973년, KCIA가 조직적으로 관계한 것으로 보이는 김대중 납치 사건 때에는 박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가쿠에이(栄) 수상에게 진사를 표했다. 일본 측은 수사를 종결시키는 데에 합의했다(제1차 정치 결착).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아래에서 다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오랜 세월, 한국 정계의 중추에 있었고,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3김 정치의 일익을 담당했다. 한일 의원 연맹 회장을 맡는 등, 양국의 파이프 역할을 했지만, 2004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각국 교과서 비교
1950년대의 일소 국교 정상화에 이어, 60년대에는 일본과 한국, 70년대에는 일본과 중국과의 사이에서 국교 정상화가 실현되었다. 중학생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의 설명은 어떠한가.
일본 -고도성장단원에서 간략하게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쿄 서적() 판에서는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체결 후에 일본이 국제 사회에 복귀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5줄 정도로 기술한다.
1955년경부터 냉전의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는 가운데, 평화 조약을 맺지 않은 소련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1956년 일소 공동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일본은 소련의 지지도 얻어 국제 연합에 가맹하여 국제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본문이 아닌 주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구나시리섬(国), 에토로후섬(択), 하보마이제도(歯), 시코탄섬()(북방 영토)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소련이 응하지 않은 관계로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해체된 후에도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방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교과서에서도 거의 같은 입장이다.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북방 영토 문제는 반드시 검정에서 체크된다. 오랜 세월에 걸친 국가의 검정으로 대동소이한 표기가 되었다라고 한다.
한편, 한국,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고도 경제 성장 속의 일본이라는 단원에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3줄로 정리한다. 일본은 1965년, 한국과 한일 기본 조약을 맺고, 한국 정부를 한반도에 있는 단 하나의 합법적인 정부로서 승인했습니다.
계속해서 일중 관계에 대해서는 4줄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본문이 아닌 주에서 일중 평화 조약제1조를 게재하고 있다.
관계가 끊어졌던 중국과는 1972년 일중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1978년에는 일중 평화 우호 조약을 맺고 그 후, 중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관계도 한층 강화되어, 교류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오쿠보 마키(真)
한국 - 5억 달러의 자금 제공에 관한 기술이 없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취급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한 것을 설명한 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 4줄 정도로 적는다.
박정희 정부는 민주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중립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숙제로서 남아 있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한일 협정을 체결후략
일본이 한국에 유상 및 무상으로 합계 5억 달러의 자금을 제공한 사실과, 그것이 한국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 김득중() 박사는 교과서는 분량이 한정되어 있어, 우선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자세한 사항은 교사가 설명하도록 하였다고 말한다.
한편, 고등학교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에서 전개된 국교 정상화 반대 운동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
김 박사는 반대 운동을 채택한 것에 대해서 격렬한 반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일본과 국교가 맺어진 점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보충 설명으로, 한일 관계 자체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나타난 박 정권의 비민주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일중 국교에 대해서는 국사 국제 정세의 변화란 항목에서 1줄만 쓰고 있다. 한중 국교 수립에 대해서는 사진만이 게재되고 설명은 없다.
일소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국사와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 과목의 대다수의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중국 – 미중 관계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일중 관계는 간단히
중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에서는 일중 국교 정상화에 대해외교 사업의 발전이라는 소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소단원은 8페이지 정도로, 일중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포함하여 3줄에 불과하다. 당시,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栄) 수상과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이 악수를 나누는 사진은 실려 있지만,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1972년, 일본 수상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중국을 방문하여,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계속하여 중국은 차례차례로 많은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중국과의 국교 수립 붐이 일었다. 중국의 외교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간단한 설명과는 달리,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외교 사업의 발전의 첫머리에서 다루고 있다.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의 사진을 포함해서 1페이지와 3분의 2페이지에 걸쳐 설명한다.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 고조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20 세기 1970년대 초, 중미 관계 개선은 양국의 공통된 요구였다. 중미 관계에 전환기가 찾아왔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잘 아는 게이오(応) 대학의 또완뤼총(聡) 준교수는 중국은 일중 국교 정상화가 중미 관계 완화의 연장선상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냉전 하에서 중소 관계가 악화되었던 1970년대, 중국 정부가 외교면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중미 관계였습니다. 중미 관계를 개선하면,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지위가 향상되는 데에 보탬이 되고, 소련이나 대만과의 관계를 고려해 보더라도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중미 관계 이외에 중점을 둔 것은 1971년 유엔에서의 의석 회복이었다. 중국 외교사에 있어서 최초의 위대한 승리였다라고 설명했다.
일본과 소련, 일본과 한국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세계사 교과서를 포함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사토 가즈오()
대만-일본과의 국교 단절에 중점
일중 국교 정상화는 대만(중화 민국)에 있어서는 일본과의 국교 단절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교과서에서도 대일 단교에 중점을 두고, 대만사와 중국사 분야에서 다루고 있다.
널리 사용되는 남일서국()의 국민 중학•사회의 대만사 부분에서는 외교 정세의 변화란 항목에서 유엔 추방으로부터 미국과의 단교에 이르기까지를 5줄로 정리하고 있다.
1971년 유엔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가맹을 받아 들였고, 대만은 유엔 탈퇴를 결정했다. 그 후 일본은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였고 각국은 입장을 바꾸었다. 1979년 미국은 중화 인민 공화국과 국교를 맺고, 중미 상호 방위조약의 종결을 선언했다. 대만에 전해진 충격은 컸으며, 대만은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대만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실무 외교를 추진하며, 국제적인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등의, 리덩후이() 정권 이후의 외교 방침을 설명하고 있다.
또, 중국사 부분에서는 3줄 정도를 할애하였다.
미국은 소련에 타격을 주기 위해 중화 인민 공화국을 끌어 들여 중국은 1971년 유엔에 가맹할 수 있었다. 그 후 중국이 일본과 미국 등과의 국교를 맺으면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 중화 민국의 외교의 폭은 좁혀져만 갔다.
교과서에서는대국 중국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국제적인 고아 대만이라는 구도를 의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국민당 정권 하인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중국사에서 유엔 추방 등에 대해 5줄 정도를 할애했지만, 일본과 미국과의 단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소와 한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해서는 신구 교과서 모두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남일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위원인 초우호이민(恵) 정치 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중국의 국교 정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이 솔선하여 관계를 정상화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라고 중점 사항을 설명한다.
다무라 히로쓰구 ()
시리즈•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17
오쿠라 가즈오() 국제 교류 기금 이사장
민중이 움직인 근현대사
근현대사는 민중이 움직였다라는 관점에서 선택했다. 동아시아 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은 포함시켰다.
역사 인식은 나라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진다. 나폴레옹은 침략자인가. 러시아인의 입장과 프랑스인의 입장은 당연히 인식을 달리한다. 문제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이 역사 인식을 논하기 이전에, 역사 그 자체에 관심이 없고 지식도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무지는 편견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오해를 낳는다.
우선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의 봉기(인도 대반란이라고도 함)를 든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이었다. 아시아 민중들이 처음으로 일으킨 대규모 반식민지 투쟁으로서,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저항은 오히려 영국이 인도를 직접 지배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로부터 인도 방위와 중국으로의 진출로 이어져, 나아가서는 아시아 정책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유신은 아시아에서 근대화의 모델을 제공했다. 권위의 상징으로 일본 황실을 전면에 내세워, 대규모 내전을 피하고 대혁명을 완수했다. 또한 중국으로의 근대화를 재촉했다.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삼국 간섭에 직면했다. 와신상담이라는 말대로, 일본 민중은 제국주의 외교를 지지하면서도, 국민도 정부도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황색인종이 재앙을 부른다는 황화론()에 민감한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는 유럽 대국들과 협조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영일 동맹을 맺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처음으로 외교에 있어서 홍보와 선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저널리즘의 역할과 민중들의 지지가 중요하다는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폴란드와 핀란드, 러시아제국의 반 차리즘 운동을 지원한 일본의공작은 대외교 여론의 최초의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라는 테러가 일본이 한국 병합을 위한 절호의 구실이 되었다. 민족 운동이 극으로 치달아 테러로 향하면, 탄압하는 쪽에서는 좋은 구실이 되어 운동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현재의 중동 테러와도 관련해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신해 혁명은 중국 혁명 운동의 원점으로서, 마오쩌둥()의 공산 혁명으로 이어진다. 러시아의 공산 혁명은 전세계의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낳았다. 공산주의의 위협이라는 선전이 없었다면, 파시즘이나 나치즘도 인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 세기 국제 정치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장쭤린()은 관동군의 모략으로 살해되었지만, 일본군도 정부도 책임을 확실히 하지 않아, 군의 규율을 약화시켰다. 군내의 통솔이 되지 않으면서, 군은 동시에 민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결정적으로 중국과 대립을 한다. 루거우차오() 사건에 의해서 중국의 내전이 국제화되었고, 중일 전쟁은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일본은 중국 민중과 완전히 적이 되어 버렸다.
원폭 투하의 역사적인 의미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일본은 핵무장을 해서는 안 되며, 핵무기는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은 원폭 투하에 대해 일절 사죄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은 핵 보유국인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다. 일본인은 이러한 모순에 대해, 전략적으로는 물론, 도의적인 의미에서 어디까지 진지하게 문제를 파악하려 하고 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 반전 운동은 일본 등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 남미 등으로 퍼져 나갔다. 이긴 것은 미국도 하노이도 아니다. 침략 전쟁에 반대한 세계의 민중이야말로 진정한 승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토뷰: 사쿠라이 이즈미(桜)
약력
1938 년생. 주 베트남, 한국, 프랑스 대사를 역임. 아오야마(青)학원대학의 특별 초빙 교수(일본 외교론•비교 문화론)이다.
리스트
세포이의 봉기
메이지 유신
삼국 간섭
러일 전쟁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중국의 혁명(신해 혁명에서부터 공산당 정권의 탄생까지)과 러시아의 10월 혁명
장쭤린()의 폭살
루거우차오() 사건
원폭 투하
베트남 반전 운동 *연대 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