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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북 고위층 망명

Posted November. 05, 2004 22:55   

1990년대 말 재미교포 K씨는 중남미의 한 소국() 정부와 비밀스러운 사업을 추진했다. 이 나라에 북한의 농업이민 수백 가구를 이주시킨다는 게 사업의 골자였다. 표면상으로는 농업이민이지만 실제 내용은 북한 급변사태 때 지도층 소개() 계획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남북간 막후 전령() 역할을 했다는 K씨는 당시 이 일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시민권자인 그에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었다. 미국 정부의 암묵적 동의 내지는 방조가 그것이었다.

그 후 이 사업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K씨는 북한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손을 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획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K씨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북한 지도부에 마지막 퇴로는 남겨 줘야 한반도의 불안정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당시 북한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할 때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었다.

장기 독재체제가 무너지기 전에 보이는 징후가 지도층의 이탈이다. 북한의 경우 이런 현상은 1990년대 후반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처형()인 성혜랑의 서방 탈출(1996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남한 망명(1997년)이 대표적인 예다. 이 밖에 장승길 이집트주재 대사(1997년) 등 북한 외교관의 망명이 줄을 이었다. 특기할 것은 고급 정보를 가진 고위층 인사일수록 미국을 망명지로 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확인이 어려운 사안의 성격상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고위층 망명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할 대목이다.

엊그제 일본 언론에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의 장남이 미국에 망명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해 길재경 부부장 미국 망명 오보() 소동처럼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런 소문이 끊이지 않는 것 자체가 북한 체제가 취약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북한 붕괴 불가론에 입각해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우리 정부 관계자들의 신념은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궁금하다.

송 문 홍 논설위원 songm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