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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딱지'의 그늘

Posted September. 29, 2003 22:55   

난 갚을 능력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2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한 아파트. 서울지방법원 K집행관(55)과 직원 등 3명이 한 조가 돼 채무자 A씨(35)의 집을 찾았다. 이 채무자가 진 빚은 카드빚으로 액수는 1300만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채무자는 집행관이 냉장고며 TV에 빨간색 압류딱지를 붙이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이날 모든 가재도구가 압류됐지만 원칙에 따라 최저가로 감정한 결과 다 합쳐야 채 100만원이 되지 않았다. 감정료 6만원을 포함한 집행비용 20만원과 이자를 갚고 나면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금액은 고작 60만70만원이다.

K집행관은 A씨의 집 외에도 오전에만 두 곳의 카드 채무자 집에 더 들렀지만 아무도 없어 그냥 돌아섰다. 그는 그래도 오늘은 칼 들고 덤비는 사람 없이 끝나서 다행이라며 압류딱지 다 붙여봐야 100만원도 안 나오는 집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최악의 불경기로 재산압류 및 강제경매가 급증하고 있다. 97년 시작된 외환위기와 더불어 급증했다가 점차 줄어들었던 재산압류가 지난해부터 다시 늘어나고 있는 것. 올해 8월 말 현재 압류 집행 건수가 이미 지난해 전체 수준에 육박했다.

집행관들이 전하는 채무자들의 가장 큰 변화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

예전에는 30% 정도의 채무자들이 돈을 갚겠다고 했으며, 당일은 아니더라도 변제가 이뤄졌는데 요즘엔 그야말로 나 죽여라는 식의 채무자들이 많다.

이에 따라 변제비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 사채조달을 통한 돌려막기 등 더 이상 돈을 융통할 곳이 없을 정도로 개인 경제가 악화돼 있다는 증거라고 집행관들은 지적했다.

카드빚 때문에 재산을 압류당하는 사람이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도 근래 들어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서울지법의 한 집행관은 예전에는 카드빚에 의한 압류가 1020%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난해부터 카드빚 채무자가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청년실업의 후유증으로 20대 초중반의 신용불량자가 늘어나면서 압류할 물품조차 없는 경우도 태반이다.

따라서 자연히 채무자들의 행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시너를 뿌린 뒤 프로판가스통을 들고 나오거나,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K집행관은 집은 빼앗겨도 옷장 안의 코트 하나 안 내놓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며 며칠 전 채무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피멍이 든 왼쪽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집행관 사무실에서 만난 다른 집행관은 그나마 폭력적으로 나오면 마음은 편하다며 영구임대 아파트에서 휠체어 탄 사람을 끌어내거나, 고의로 병원에 계신 노모를 데려다 놓는 채무자를 상대했을 때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김선우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