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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통장 신고했더니 되레 소송… 피해자 90%가 패소[히어로콘텐츠/히든③-上]

입력 | 2026-06-24 04:30:00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
〈3〉 돈세탁 마지막 단계는 ‘소송’
피해자 신고로 대포통장 동결되자
사기꾼들 “범죄 증명을” 소송 걸어
10건 중 9건 “통장 풀어라” 판결




이기철(가명) 씨가 대포통장 조직으로부터 당한 소송의 판결문을 3월 30일 대전 동구의 자택에서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2023년 4월 보이스피싱에 속아 900만 원을 잃은 것도 모자라, 돈이 송금된 대포통장의 주인으로부터 되레 소송을 당했다.

“그 사람들, 법원에서 범죄자라고 판결했어요?”

이기철(가명·72) 씨는 기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질문부터 쏟아냈다. 3월 25일 대전 동구의 한 빌라. 방 하나를 여러 세입자와 쪼갠 15.6㎡(약 5평) 남짓한 그의 거처엔 옷과 약봉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씨가 묻는 ‘그 사람들’이란 지난해 12월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조진수(39·가명) 일당이었다.

조진수는 보이스피싱범과 손잡은 대포통장 조직이었다. 대포통장은 남의 명의로 만들어 범죄에 쓰는 통장을 말한다. 2023년 4월 이 씨가 보이스피싱에 속아 입금한 900만 원은 이 일당의 대포통장을 거쳐 가상자산(코인) 지갑으로 빠져나갔다. 사기 친 돈의 꼬리를 지우는 ‘돈세탁’이었다.

괴롭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씨가 경찰에 신고하자 일당의 통장은 돈을 빼낼 수 없게 동결됐다. 그러자 조진수 일당은 통장 주인 이름으로 거꾸로 이 씨에게 소송을 걸었다. ‘나는 보이스피싱과 무관하고 물어줘야 할 빚도 없으니 통장을 풀어 달라’는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이었다. 적반하장식 소송이지만, 이기면 통장이 살아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에 묶여 있던 피해자의 돈까지 합법적으로 빼낼 수 있었다.


변호사 비용조차 없던 노인은 홀로 법정에 섰다가 패소했다. 피해자가 ‘저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직접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일당의 소송 비용도 이 씨가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조진수 일당이 보이스피싱범으로 단죄된 건 지난해 12월이었다.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 씨의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송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씨는 자기가 당한 소송이 뭔지 끝내 모르겠다는 듯 “나는 그 재판이 저…, 어렵다”면서 “사기꾼들인데 징역 2년밖에 안 받았냐”고 자꾸만 물었다.

최근 채무 부존재 확인 소송은 보이스피싱 조직의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 최근 5년간 법원 판결 306건을 분석해 보니 소송을 건 쪽이 277건을 이겼다. 승소율 90.5%. 이렇게 되살아난 통장 중 일부는 또 다른 피해자의 피눈물을 짜내는 데 다시 쓰였다.

대포통장 동결은 사기당한 돈이 세탁돼 사라지는 직전에 붙잡아 두는 마지막 안전장치다. 그런데 그 장치를 합법적으로 풀어 버리는 통로가 법원에 열려 있는 셈이다. 왜 법원은 번번이 통장 주인의 손을 들어줬을까.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판결문 306건을 전수 분석해 그 실태를 쫓았다.





‘정상거래’ 각본 짠 대포통장 조직, 피해자에 “갚을 빚 없다” 소송

노후자금 900만원 털린 70대 신고
사기꾼, 통장 묶이자 적반하장 소송
1인2역 코인 거래 증거 치밀한 조작

‘피해’ 증명 못한 피해자, 결국 패소
사기극 밝혀졌지만 솜방망이 처벌

이 씨 앞으로 법원 우편물이 날아든 건 2023년 4월 말이었다. 난생처음 받아 보는 소장(訴狀)이었다. 소송을 건 원고는 변주석(가명·36). 이 씨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지만 실은 조진수 일당 중 한 명이었다. 소송 이름은 더 낯설었다. ‘채무 부존재 확인의 소.’ 변주석이 이 씨에게 갚을 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겠다는 소송이라고 했다. 이 씨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변주석에게 돈을 빌려준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짚이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열흘 전 당한 보이스피싱이었다.



● 5분 만에 증발한 노후 자금
“금융감독원 서OO입니다. 이기철 씨 명의가 사기 조직에 도용돼 은행에서 6400만 원이 대출됐어요.”

4월 13일 오후 6시경 걸려온 전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곧이어 인천지검 수사관이라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대출을 취소하려면 90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심쩍었던 이 씨는 직접 인천지검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그런 수사관이 실제로 있는지 물었다. 진짜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씨는 그 길로 900만 원을 송금했다. 모두 거짓이었다. 이 씨의 휴대전화는 해킹돼 있었다. 그가 건 전화는 가로채기를 당했다. 안내원인 줄 알았던 목소리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

이 씨가 사는, 방 하나를 여러 세입자와 쪼갠 거처엔 약통과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대포통장 조직은 이 씨에게 소송을 걸며 “정상적인 코인 거래였다”고 주장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900만 원은 이 씨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이틀 뒤 이 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늦었다. 젊은 시절 공장에 다니고 타일을 붙이며 모은 돈은 송금 당일 대포통장 여러 개를 거쳐 추적이 어려운 해외 코인 거래소로 빠져나간 뒤였다. 걸린 시간은 단 5분. 피해금이 코인으로 바뀌기 전 송금된 계좌가 변주석 명의였고, 이 씨의 신고로 그 통장은 동결됐다. 소장은 그에 대한 응수였다.

변주석은 법원에서 자신을 코인 환전업자로 포장했다. 고객 의뢰를 받아 정당하게 코인을 팔고 대금을 받았을 뿐인데 이 씨의 신고 탓에 통장이 막혀 손해가 막심하다는 주장이었다.



● 소송까지 설계한 조직, 변호사도 못 구한 노인
이 씨는 변호사를 구하러 대전지법 앞 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선임비가 500만~700만 원이라고 했다. 노후 자금을 털린 노인에게는 없는 돈이었다. 그는 변호사 없이 법정에 섰다.

7개월 뒤 법원은 조진수 일당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도 이 씨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발목을 잡은 건 대법원 판례였다. 조진수 일당이 “갚을 돈이 없다”고 주장하면, 갚을 돈이 있다는 사실은 이 씨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저 사람은 사기꾼이 맞다’는 걸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칠순 노인이 범죄 조직을 상대로 들이밀 수 있는 증거는 ‘내가 보낸 돈이 5분 만에 변주석 통장으로 흘러갔다’는 거래내역표 한 장이 전부였다. 반면 조진수 일당은 고객과 주고받았다는 코인 거래 대화 내역까지 근거로 제출했다. 법원은 패소한 이 씨에게 조진수 일당 측 소송 비용까지 물렸다.

뒤늦게 드러난 조진수 일당의 실체는 2023년 2월부터 보이스피싱 조직과 손잡고 움직인 전문 대포통장 조직이었다. 조진수 일당이 보이스피싱 범죄를 설계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대포통장이 없었다면 범죄는 이뤄질 수 없었다. 이들에게 소송은 사전에 기획한 세탁 공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수법은 치밀했다. 일당은 자기들끼리 1인 2역을 했다. 다른 조직원은 대포통장의 주인인 척 변주석에게 “코인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변주석은 코인 환전업자인 척 답장했다. 이 가짜 대화를 통째로 갈무리해 법원에 ‘정상 거래의 증거’로 낸 것이다.

이들은 소송과 동시에 은행에도 통장 동결에 이의를 제기하며 같은 가짜 대화를 증거로 밀어 넣었다. 현행 제도상 통장 주인이 소송에서 이기면 은행은 동결을 풀어 줘야 한다는 허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조진수 일당은 이 씨 사건 사흘 전 제주의 또 다른 피해자에게서 560만 원을 가로챈 뒤 똑같은 소송으로 통장을 되살렸다. 가짜 환전업자 행세와 허위 대화 내역, 수법도 판박이였다.



● 조작극 잡았지만… 피해자는 싸울 힘 잃었다
완전 범죄 같던 사기극은 1년여 뒤 엉뚱한 곳에서 금이 갔다. 조직원 한 명이 중고 거래 사기를 치다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압수된 휴대전화에는 법원에 제출했던 ‘코인 대화’의 제작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록을 넘겨받은 검찰이 대화를 한 줄씩 뜯어보자 허점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수사한 임지수 대구지검 김천지청 부장검사는 “면밀히 따져 보니 대화가 오간 시간과 실제 돈이 움직인 시간이 맞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를 소송 사기로 확대해 일당을 재판에 넘겼다. 법원을 속여 동결 통장을 되살린 수법이 법정에 오른 첫 사례였다.

올 4월 말 인천지법에서 이들의 2심 선고가 열렸다. 재판부는 “자금세탁책으로 보이스피싱 범죄에 핵심적으로 가담해 불특정 다수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며 “사회적 해악이 매우 크다”고 질타했다. 그런데 선고된 형량은 1심보다 오히려 가벼워졌다. 조진수는 징역 2년, 변주석은 징역 1년 6개월 등이었다. “최근 일부 피해자와 합의하고 피해금을 돌려주려 노력했다”는 게 감형 이유였다.

선고 직후 법정을 나서는 일당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방청석의 가족과 지인을 돌아보기도 했다. 일주일 전 선고가 갑자기 미뤄졌을 때 굳은 얼굴로 빠져나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일당 중 일부는 줄어든 형량마저 무겁다며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조진수 측은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취지를 재판 중에 밝혔다”고 했고, 변주석 측은 “재판 과정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피해자들과 합의도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법원이 조진수 일당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에서 형량이 가벼워졌고, 그동안 이 씨의 삶은 더 고달파졌다. 법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이 씨는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이 씨의 삶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근엔 코인 투자 사기까지 당해 남은 재산마저 잃었다. 두 번째 사기 사건도 범인이 대포통장을 써 추적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에 진척이 없다. 보증금 100만 원인 방의 월세 22만 원은 간신히 기초연금으로 메우고 있다. 피해 후 쓰러져 혈압약을 먹기 시작했고, 한때 운전대를 잡고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했다. 그 뒤 병원을 찾아가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언제 죽어도 장기는 멀쩡할 거 아니여. 병든 사람한테라도 이식해 주면…”이라고 했다.

재심을 권한 사람도 있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재판에서 또 지면 그 사기꾼 놈들 변호사 비용을 내가 물어내야 하잖아요. 난 이제 무서워서 법원 근처에도 못 갑니다.” 노인은 마지막 투지마저 잃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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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임재혁 기자 heok@donga.com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조승연 기자 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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