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 3500억弗’ 사상 최대 해외투자 약속 기술-노하우-자본 다시 국내 들일 때 성공 설계, 소재, 부품 등 중기 참여할 길 열려야 경로 막히면 대기업 해외자산만 불리는 격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광고 로드중
노자는 도덕경에서 “아름드리 큰 나무도 털끝 같은 씨앗에서 생겨나고, 아홉 층의 누대도 흙을 쌓아 올려 세워지며, 천 리 길도 결국 발밑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조치로 이제 막을 올린 ‘한미 전략적 투자 관리를 위한 특별법’(대미투자특별법)을 보면 이 구절이 자꾸 떠오른다.
6월 18일 전면 시행에 들어간 대미투자특별법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해외투자 약속이다. 2000억 달러의 대미투자와 1500억 달러의 조선협력투자, 합쳐서 3500억 달러(약 540조 원)이다. 그런데 이번에 통과된 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지를 들여다보면, 털끝 같은 씨앗이 잘 보이지 않고 누대를 쌓을 흙도 듬성듬성해 보이는 것은 내 눈에만 그런가 모르겠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부는 이 투자를 해외에 쌓아두는 자산으로 보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의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성장 전략으로 보는 것일까.
나는 해외로 나가는 투자가 정말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려면 그 과정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 그리고 자본이 다시 국내로 흘러들어와야 한다고 자주 말해 왔다. 국제경제학에서는 이를 해외직접투자의 생산성 환류효과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효과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흡수할 국내 공급망의 저변이 있어야 비로소 작동한다.
광고 로드중
나는 두 가지 재환류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기업이 미국에 생산기지를 옮기더라도, 그 일을 뒷받침하는 설계와 소재, 정밀가공 같은 영역을 국내 중소기업이 계속 맡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만들어진 기술과 수요가 국내 생산으로 흡수된다. 이 연결이 끊어지면 산업이 서서히 비어가는 공동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물론 해외투자가 무조건 산업공동화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다국적기업의 활동이 국내 사업체의 생존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보니, 그 답은 산업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결국 관건은 해외투자 그 자체가 아니라, 국내 기업과 산업의 연결 구조가 얼마나 단단한가에 있다.
둘째, 이 투자 사업 자체에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이게 더 절박한 문제다. 대형 해외 인프라 사업에는 경로의존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누가 처음 설계와 인증, 기술표준을 같이 정하느냐에 따라 이후 수십 년간 그 표준에 맞춰 부품을 만들 수 있는 기업과 만들 수 없는 기업의 운명이 갈린다. 사업 초기에 들어간 기업은 그 표준 자체를 함께 설계하면서 향후 발주 자격을 자연스럽게 얻지만, 나중에 들어가는 기업은 이미 정해진 표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그러니 중소기업들의 참여가 사업 초반에 이뤄지는가, 아니면 사업이 다 짜인 뒤에 이뤄지는가는 단순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수십 년의 기업 간 공급망 자체를 결정하는 문제다.
이 두 경로가 막히면 국내 산업 생태계는 서서히 비어가고 중소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 들어갈 기회마저 놓치게 된다. 그러면 3500억 달러는 결국 몇몇 대기업의 해외 자산만 불려주는 결과로 끝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같은 숫자를 서로 다른 잣대로 재고 있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누군가는 3500억 달러를 환율과 수익률로 잰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일자리와 기술로 잰다. 두 잣대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앞의 잣대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광고 로드중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