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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팽려원이 미제 간첩이라며?”

입력 | 2026-06-22 23:00:00

김정은(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이달 9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인 펑리위안 여사(왼쪽)와 평양 순안공항에서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지난해 여름, 북한 사람들이 모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었다.

“팽려원이 미제 간첩이라면서?”

“응. CIA(미국 중앙정보국) 첩자라던데….”

팽려원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 이름을 한자어 표기 그대로 지칭한 말이다. 북한에선 시 주석도 습근평 주석이라고 공식 표기한다.

팽려원 간첩설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북한 내부에서 몰래 유통되는 USB메모리들엔 비단 한국 드라마나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앙 기관 강사들이 특정 기관에서 하는 비공개 강연 또는 ‘녹음 강연’도 담겨 퍼진다.

세상 소식을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에서 몇 줄 또는 몇 초만 접하는 북한 사람들에겐 이런 강연은 매우 귀한 정보로 간주돼 빠르게 퍼진다. 실제로 엄선된 특정 계층 대상으로만 진행되는 비공식 강의에서는 공식 매체를 통해선 알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공식 매체 보도에 없는 이야기를 섞어 강연해야 청중이 ‘우리는 신임받는 사람들이구나’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지난해 초부터 북한군 총정치국에서 고위 군관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의 USB가 북한에 쫙 퍼졌다. 유창한 말발을 자랑하는 강사 육성이 녹음된 MP3 파일이 저장된 USB였다.

해당 강연엔 러시아에 파병된 군인들의 ‘전설적인 위훈’, 여러 나라의 정치 정세 등이 담겨 있다. 북한이 러시아 파병군의 존재를 지난해 4월 인정했으니, 강연이 진행된 시기는 그 이후로 추정된다.

강연 중 북한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던 내용은 중국 관련 내용이었다. 해당 강사는 중국이 공화국(북한)을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비방하다가 급기야 “습근평의 부인 팽려원이 CIA 첩자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팽려원이) 미국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습근평의 권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다”고 주장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조중 친선의 역사를 열거하며 중국의 대조선 정책이 그릇됐다고 단죄하자 왕 부장이 진땀을 뺐다는 내용도 있다.

북한 내부에서 유포되는 이 같은 강연 파일들은 다 실제로 했던 강연을 녹음한 것이다. 개인이 몰래 이런 파일을 만들어 퍼뜨릴 수도 없지만, 만에 하나 만들었다가 적발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멸족되는 심각한 정치적 범죄로 간주한다. 앞서 중국 관련 내용의 강연도 당국 승인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인지라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모여 앉을 때마다 “팽려원이 미국 간첩이라며…”라며 웅성거린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해 8월부터 인민군 보위국(과거 보위사령부)이 나서서 시중에 유포되고 있는 USB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당국이 규정한 불법적인 파일도 아닌 데다, 내놓으라는데 더 이상 퍼뜨렸다간 처벌받을 것 같으니 북한 사람들은 이런 지시는 잘 따른다.

그 한 달 뒤인 지난해 9월 3일 김정은은 중국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았다.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르기 전 김정은은 시 주석, 펑 여사와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 이 모습을 신문과 방송에서 접한 북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아니, 팽려원이 간첩이 아니었네.”

이달 초 시 주석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펑 여사도 동행했다. 이설주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펑 여사의 모습을 지켜보며 북한 사람들은 USB 속 강사 음성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에선 이런 괴이한 강연이 진행된 것일까. 강사가 자기 마음대로 떠벌리는 강연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우리는 1년 전 북한 내부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첫째, 대중 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는 것. 둘째, 팽려원을 간첩으로 몰아서라도 중국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심리를 막으려 했다는 것. 셋째, 중국이 나쁜 놈이어서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 등이다. 물론 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배경에는 러시아에만 붙으면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없이는 절대 살 수가 없다. 시 주석 방북 이후 북한 사람들은 어려운 생활이 조만간 해소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또 미제 간첩인 줄 알았던 팽려원이 평양에서 좋은 인상을 갖고 돌아갔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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