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시드니
B컷. 화보나 광고 촬영에서 대표 사진으로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컷을 뜻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점점 A컷보다 B컷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연출된 미소보다 순간 스쳐 지나간 표정이 더 진짜 같기 때문이다. 빅스타의 화보보다 메이킹 필름이나 B사이드 버전이 더 화제가 된다. 여행도 그렇다. 여행지 랜드마크보다 뒷골목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호주 시드니의 A컷은 분명하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 엽서와 관광안내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피드에는 늘 엇비슷한 풍경이 등장한다. 유튜브 알고리즘도 마찬가지다. 시드니의 ‘얼굴’은 누구나 본다. 궁금한 건 ‘표정’이다. 마침 남반구 최대 문화축제 ‘비비드 시드니(Vivid Sydney)’가 열렸다. 매년 5월에서 6월 초에 빛과 음악, 그리고 미식이 시드니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 축제를 통해 시드니 사람들은 어디에 시간을 쓰고 어디에 감정을 남겨 둘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관광안내서에는 나오지 않는 그곳의 표정을 찾아 나섰다.
● 시드니의 기억을 보관하는 동네
‘기억 저장소’ 사포 북스, 카페 앤 바.
글리브는 시드니의 기억 같은 동네다. 글리브라는 말은 원래 교회 소유 토지를 뜻한다. 영국이 시드니에 죄수로 구성된 정착민을 보내기 시작한 1788년 무렵 글리브는 성공회 성직자 리처드 존슨에게 하사된 토지였다. 시드니가 초고층 빌딩 숲의 금융 중심지로 변모하는 동안에도 이곳은 오래된 풍경을 지켜 왔다. 걷다 보면 현재보다 과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포 북스, 카페 앤 바’가 보인다. 허름한 책방 느낌이다. 빛이 바랜 외벽과 삐걱거리는 목재 바닥, 좁은 계단이 창밖에서 보인다. 그 안에 들어선 순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방과 방, 복도와 계단을 따라 천장까지 닿는 책장들이 이어지며 미로를 만든다. 책이 족히 수만 권은 돼 보인다. 누군가의 비밀 도서관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호주 역사를 시작으로 문학, 철학, 예술 서적이 끝없이 진열돼 있다. 절판된 고전과 사전, 표지를 두꺼운 합지로 만들어 실로 엮은 양장본…. 시드니의 ‘어제’ 저장소다. 책 분류표는 모두 손으로 썼다. 워드 프로그램으로 출력하면 더 깔끔할 텐데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간을 보관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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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 있는 카페에서 인기 있다는 ‘플랫 화이트’ 는 라떼보다 진하고 카푸치노보다 부드럽다. 가격도 착해 5.5호주달러(약 5900원). 시드니의 감성을 더 선명하게 붙잡아 두는 마침표 같다.
● 단 하나 남은 장인들의 백화점
야간 조명이 비추는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
1892년 문을 연 스트랜드 아케이드.
시드니에 남은 마지막 빅토리아 시대 쇼핑 아케이드. 시드니의 ‘생존자’다. 유리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철제 장식은 당시 런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명품 브랜드 간판은 안 보인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죽 공방에 놓인 오래된 싱거(Singer) 재봉틀이 시선을 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일제강점기에 사용됐다며 전시된 싱거 재봉틀을 본 적이 있다. 여기선 여전히 현역이다. 쇼윈도 너머에서 구두 장인이 가죽을 다듬고 있었다. 맞춤 셔츠 가게에서는 백발의 재단사가 셔츠 칼라를 손질하고 있었다. 창에는 폭과 곡선, 각도가 모두 다른 칼라 샘플 20여 개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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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랜드 아케이드 가죽 공방에 놓인 싱거 재봉틀.
스트랜드 아케이드 1층 중앙 ‘검션(Gumption) 커피’는 세계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란다. 시드니 3대 커피 맛집으로 꼽힌다고. 호주 커피 대표 브랜드 ‘커피 알케미(Alchemy)’가 운영하는 매장인데 바리스타 챔피언들의 로스터리다. 바리스타는 또 다른 장인인 셈이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오늘의 커피’인 이곳 ‘배치 브루’는 무조건 추천이다. 시간을 소중하게 다루는 장인정신의 마지막 증인들을 보고 장인의 커피까지, 이런 호사가 있나 싶다. 경천철(트램) 퀸빅토리아 빌딩(QVB)역에 내렸다면 반드시 여기를 와야 한다.
● 사람을 전시하는 미술관
뉴사우스웨일즈 주립미술관.
호주 최고 권위 초상화상(賞)인 ‘아치볼드 프라이즈’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배우, 음악가, 예술가, 평범한 시민들 초상화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림 옆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상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 등 설명이 붙어 있다. 얼굴이 아니라 삶을 그린 것이다. 이 사람들이 곧 ‘시드니이자 호주’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올해 대상 수상작 앞에서는 오랫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원주민 원로 일루완티 켄 초상화였다. 주황색 배경에 서 있는 그의 코 옆 깊은 주름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호주 남부 사막 지역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 치유사였다. 한 사회가 가장 중요한 얼굴로 누구를 선택하는지를 보면 그 사회가 무엇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다. 호주는 가장 유명한 얼굴보다 가장 오래 공동체를 지켜온 얼굴을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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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하버 브리지가 오후 햇살 아래 거대한 아치의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시드니=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