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사다리’로 변질된 전세 제도 집값-전셋값 상호작용 왜곡 커져 전세 대신할 ‘포스트 전세’ 대책 필요 반도체 초과 세수로 ‘주택 닥공’해볼 만
박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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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전세대란은 서울 올림픽 전후 벌어졌다. 부동산 투기 광풍에 1987년부터 2년간 전셋값이 32.6% 치솟았다. 1990년 두 달여 만에 세입자 17명이 목숨을 끊었다. 놀란 정부가 ‘전셋값 부당인상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시민 사회에서 ‘전월셋값 안 올리기 운동’까지 했다. 지금은 흔한 다가구주택을 급히 짓고 주택 임대차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올린 게 이 무렵이다.
그로부터 40년이 다 돼 가지만, 실패에서 배운 게 별로 없다. 전세는 건재하고 전세난은 되풀이된다. 전세대란의 소방수였던 다가구주택이 전세 사기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4만 명의 피해자가 생겼다.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몬 전세 사기 대란 앞에서도 근본 문제를 바로잡기는커녕 전세가 서민의 ‘주거 사다리’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전세는 오히려 태생부터 집주인의 ‘투자 사다리’에 가까웠다. 전세가 등장한 19세기 개항장이나 1970, 80년대 경제 개발 시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살 집이 부족했다. 세입자가 집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을지 불안한 집주인들은 목돈을 보증금으로 요구했다. 그런 전세가 그렇게 훌륭한 주거 사다리라면 한국에만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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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집값 대비 전셋값)은 50%가 넘는다. 집주인보다 세입자 지분이 더 많다는 뜻이다. 기업이라면 세입자가 대주주다. 주택시장에서는 집주인이 전권을 쥔다. 세입자가 지분을 소유한 주주가 아니라 돈을 빌려준 채권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계부채 통계에도 안 잡히는 전세의 존재야말로 한국 주택시장이 세입자의 사금융에 의존하는 투자 시장으로 변질됐다는 증거다.
제대로 된 정부와 정치인이라면 금융시스템을 우회하는 ‘그림자 금융’인 전세의 위험을 경고하고 규모를 줄여 가야 한다. 그러나 절연은커녕 오히려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나쁜 선택을 했다. 전세 대출을 해주고, 보증을 서고, 집주인을 위한 전세금 반환 자금 대출까지 만들었다. 투기와 사기의 먹잇감이 된 전세가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런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몸집이 커진 전세는 이제 집값과 한 몸처럼 움직이며 시장을 왜곡한다. 국토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요즘은 집값과 전셋값이 서로 당겨주고 밀어주는 상호작용을 한다. 전셋값이 오르면 시차를 두고 집값을 밀어 올리고, 집값이 오르면 시차를 두고 전셋값이 뛴다. 투기 세력들이 노리는 지점이다. 이 연결 고리를 끊으려면 전세 대출에 대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의 단계적 도입 등을 금융당국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지난달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6억8000만 원이다. 전세 주거 사다리론자들은 그래도 전세 비용이 월세보다 싸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전셋값과 집값이 상호작용하는 구조에서는 조삼모사일 뿐이다. 대출로 만들어진 전세 보증금이 주택시장에 흘러들어와 집값을 밀어 올리고, 올라간 집값이 다시 전셋값 상승을 이끈다. 세입자는 결국 나중에 집을 사거나 전세 재계약을 할 때 한꺼번에 더 큰 돈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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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부터 오세훈 서울시장,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까지 전세난에 대해 나름의 해석과 진단을 내놨지만, 세입자들이 수십 년 전부터 듣고 싶어 하는 진짜 주거 사다리 얘기는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남 탓이나 위로보다 전세를 대신할 대안 주택의 ‘닥공’(닥치고 공급)이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