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범 사회부 사건팀장
광고 로드중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 자리 잡은 어린이집은 3년 전부터 놀이터에서 하는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실외에서 하는 물놀이와 시장놀이를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지만, 이제는 어렵다고 했다. ‘아이들 노는 소리에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다’는 식의 민원이 계속해서 들어와 관리사무소에서 야외 활동을 자제해 달라고 했다는 이유다.
‘1% 민원에 휘둘리는 사회’ 기획을 준비한 취재팀이 이 어린이집 교사에게 들은 경험담이다. 4회에 걸친 기획을 준비하며 취재팀이 만난 수십 명의 교사,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비슷했다. 목소리가 큰 일부의 민원에 다수의 상식이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소수 악성 민원의 풍선효과
현장에서는 소수의 민원을 피해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올 3월 전북의 한 초등학교에는 학부모 한 명을 위한 ‘직통 업무폰’이 만들어졌다. 민원에서 시작된 갈등으로 스트레스와 업무 부담이 가중되자 관할 교육지원청이 내놓은 대안이었다. “교감 선생님과 해당 학부모가 직접 연락하면 다른 교사들의 불안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유다. 문제를 중재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지만, 누가 봐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당연히 설치 직후 다른 학부모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광고 로드중
문제가 현장에서 해결되지 않는 건 19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낡은 규정이 만든 원칙 탓이 크다. 당시 제정된 민원사무처리규정은 민원의 ‘무조건 접수’와 ‘신속 친절’ 원칙을 담고 있다. 또 1997년 제정된 민원처리법에는 행정기관이 특별한 규정 없이 민원 접수를 보류하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 담겼다.
물론 이때만 해도 국민들의 정당한 민원이 행정기관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었다. 민원에 ‘친절 봉사’로 대응하지 않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였던 때다.
실제로 1999년 3월 경찰청은 ‘쪼가리 가져왔어?’라는 제목의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민원실 경찰이 연습운전면허증을 찾으러 온 20대 여성 민원인에게 ‘접수증’을 가져왔느냐는 질문을 반말로 했다는 불친절 사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런 책을 만들어 일선에 배포해야 했을 만큼 문제가 심각했다는 이야기다. 2006년 법이 전면 개정되며 민원 업무를 ‘신속 공정 친절’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는데, 이런 세태가 반영된 탓일 것이다.
낡은 민원 원칙 돌아볼 때
분위기가 바뀐 건 2010년 이후다. 감정 노동자 문제가 떠오르며 공공기관 악성 민원인 문제도 함께 불거지기 시작했다. 2022년 법이 개정돼 민원 처리 담당자의 보호와 관련한 조항이 생겼지만, 국민의 권익인 민원이 소수에 의해 남용되는 현상은 없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흘러온 것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출한 2021∼2025년 국민신문고 민원 관련 자료를 보니 민원인 1명이 1년간 4만6669건의 민원을 접수한 경우도 있었다.
광고 로드중
권기범 사회부 사건팀장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