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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법무사 합격… 인생 가시밭 헤친 소년 번데기 장수[은퇴 레시피]

입력 | 2026-05-16 01:40:00

[은퇴 걱정 직장인 필독 레시피] 지난해 최고령 법무사 합격자 한상범 씨
어린시절 급사와 번데기 장사하며 가난 속에서도 학업 의지 이어
사고 보상금으로 대학진학 선택… 법률전문가 꿈꿨으나 수 차례 낙방
생업 위해 사무장 근무 이어가… 60세 넘어 본격적으로 공부해
행정사 거쳐 법무사 최종 합격… 정년 없는 전문직으로 인생 2막




한상범 씨가 지난해 차린 자신의 사무실에서 활짝 웃고 있다. 책꽂이에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를 하면 꿈을 이룬다’는 문구가 놓여 있다. 한민주 채널A CD

“오랫동안 지고 온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습니다. 평생의 숙제를 마친 듯 했습니다.”

지난해 2월, 70세의 나이로 법무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던 당시를 회상하는 한상범 씨(71)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깊은 감회가 담겨 있었다.

●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대학진학

그는 초등학교를 마친 뒤 모 대학 시설에서 잔일을 해주는 급사로 일했다. 신문배달, 번데기 장사 등도 했다. 대전 도시 노동자 가정의 4남 2녀 중 셋째. 학업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는 것도 버거운 가난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했으나 입학금은 끝내 마련하지 못했다.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재건학교’와 ‘전수학교’에 다녔다. 1960∼70년대 세워졌던 재건학교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중학교 교과 과정을 가르쳤다. 주야간으로 운영됐다. 전수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 내용을 가르치며 취업을 도왔던 기관이다. 한 씨는 이 학교들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전수학교를 마치고 책 판매원을 했다. 백과사전류 등을 이곳 저곳 방문하며 판매했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형버스에 치었다. 한쪽 발을 절단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다행히 봉합수술은 잘됐다. 주변에서는 이 때 나온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작은 가게라도 차려 먹고 살라고 했지만 그가 택한 것은 대학 진학이었다. 마침 검정고시에 합격한 즈음이었다. 이 보상금으로 자취방을 얻어 공부에 집중한 뒤 국민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 계속되는 낙방 후 꿈 접은 법학도

법학 공부는 오래된 꿈이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그의 형이 억울하게 절도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은 일이 있었다. 그때 “너는 꼭 법관이 돼 보라”던 형의 말이 머릿속에 자리했다.

졸업하고 취업해 결혼했다. 그동안 학자금 융자를 갚았다. 이후 부인의 동의를 얻어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시험 준비를 한 뒤 1년 반 만인 1983년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수험 생활을 이어 갔지만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틈틈이 법무사 시험도 치렀다. 법무사 시험제도는 1992년에 처음 생겼다.

법무사란 법률 전문가로서 등기, 공탁, 개인회생·파산·면책 신청 등과 관련한 대리 업무를 한다. 소장을 작성하고 상대 소장에 대한 답변서를 쓰기도 한다. 변호사는 법률 전반에 대한 상담을 제공하고 소송대리인으로서 법정에 출석하여 변론할 수 있는 반면 법무사는 소송대리권이 없고 소송 서류의 작성 및 제출 권한만 있다는 차이가 있다. 변호사는 소송대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많은 법률 문제의 처리는 법무사가 하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 비용을 들이지 않고 나 홀로 소송을 하려는 이들도 법무사를 많이 활용한다.

소득 없는 수험 기간이 길어지면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과 불안감 등으로 인해 한 씨의 공부는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수험 생활을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으로 일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60세가 다가오자 사무장 일도 더 할 수 없었다. “나이가 있으니 다른 일을 알아보라”는 말을 들었다.

● 노후 대비 다시 법무사 시험

이때부터 자격증을 따서 노후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때마침 생긴 행정사 시험을 준비했다. 행정사는 각종 민원 신청, 인허가, 출입국 업무 등 행정기관을 대상으로 한 서류 작성 및 제출 업무를 대행한다. 58세 때인 2013년 제1회 행정사 시험에 합격했다. 60세에 행정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행정사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옛 선배가 찾아와 법무사 시험에 재도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법무사 시험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꿈꾸었던 법률 전문가가 되어 보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2017년 사법시험이 폐지된 뒤 변호사나 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다닌 뒤 변호사 시험에 응시해야 한다. 이런 제한이 없는 법무사는 노년에 법률 전문가가 되기 위한 거의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많은 업적이나 부를 이루신 분들은 이 나이에 세계여행을 하며 지내실 테지만, 어떤 일을 계속 해 오다가 잘 안됐던 사람은 50이 됐든 70이 됐던 몇 살이 됐든지간에 한번은 강한 정신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자기가 해 보고 싶었던 거에 도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었어요.”

● 긍정과 체력관리로 나이 이겨

60세 넘어 다시 법무사 시험 준비를 했다. 몇 번 시험을 치러 본 뒤 65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젊은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 했다는 점이다. 세월 속에서 많은 일을 겪고 난 뒤 “어차피 인생의 종점은 행복이며 그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는 거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행정사 사무실에서 매일 밤 12까지 일하며 공부했다. “손님이 없을 땐 공부할 시간이 생겨서 좋고, 손님이 있으면 돈을 벌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공부량이 부족하다 싶으면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더 공부했다. 작은 집에는 책상을 들일 공간이 없었기에 밥상을 펴고 공부하거나 세면대에 널빤지를 걸치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의자를 가져다 앉아 공부하기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거나 공원 산책을 하는 등 여유를 즐기며 쉬는 데 집중했다. “어차피 살 거 기분 좋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체력 관리를 위해 매일 아침 사과와 비타민C, 홍삼과 계란을 먹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일어난 뒤에는 꼭 30분가량 허리와 목을 풀어주며 스트레칭을 했다.

마침내 지난해 2월 제30회 법무사 시험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었다. 첫 법무사 시험을 본 지 33년 만이었다. 사시 포함 평생에 걸쳐 20회 가까이 낙방한 뒤였다. 주민등록상에는 195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55년 생으로 70세 되던 해였다.

그는 “제 나이가 70이었지만 마음은 항상 청년 같았거든요. 세월이 흘러간 거는 흘러간 거고, 저는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합격을 한 거라 특별한 거는 없었어요”라면서도 “제가 법률과 관계된 생활을 오래 했는데, 그 경험을 현실 속의 자격증과 연결해 살릴 수 있다는 점이 기쁩니다”고 했다.

● 소득보다 성취감과 긍지가 주는 행복

그는 지난해 법무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법무사의 수입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월 100만 원에서 1000만 원 단위까지 다양하다고 했다. 변호사 및 다른 법무사들과의 경쟁도 심한 상태여서 합격만 하면 무조건 많은 돈을 번다고 보기는 힘든 상황이다.

“제가 이 나이에 무슨 큰돈을 벌기보다는 가게 세 내고 생활 유지하는 정도로 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재미있어요.”

개업한 지 1년 정도 지난 지금 그의 소득은 월 200∼300만 원 정도 된다고 했다. 자신의 활동 정도에 따라 자신의 지명도를 높일 수 있고, 그에 따라 앞으로 소득도 더 늘어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는 변호사 사무장, 행정사 등 폭넓은 경험과 법무사로서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의뢰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데 대해 “굉장한 긍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 한 뒤 “고맙다”라는 말을 듣고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 더 나은 활동을 통해 더 좋은 날들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데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는 돈보다도 늦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어코 이루어 낸 자신의 성취,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느끼는 보람과 긍지가 더 큰 행복감을 주고 있었다. 은퇴할 나이 이후 오히려 꿈을 향해 더욱 달려온 그가 얻은 열매다.

● 중장년 몰리는 법무사… 판례 공부가 핵심

법무사 시험은 비교적 난도가 높지만 최근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응시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2017년 3276명이었던 법무사 1차 시험 응시자 수는 2020년 4070명으로 늘어난 뒤 지난해 제31회 1차 시험 때는 8154명으로 증가했다. 2020년 이후에만 두 배가량 늘었다. 이는 최근 고용 불안 등으로 인해 노년에도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전문 자격증을 취득하려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올해 2월 발표된 제31회 법무사 2차 시험 합격자 수는 221명이었는데 41세∼45세 40명, 46∼50세 60명, 51세 이상 55명이었다. 40세 이상이 합격자 수의 70%를 차지했다. 최고령 합격자는 68세였다. 2차 시험의 벽이 높다. 한 씨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례를 어떻게 해석해 사안에 적용하는지를 공부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 씨는 암기 위주인 1차 시험을 치를 때는 “꼭 외워야 할 것들을 추린 뒤 이들의 머릿글자를 따서 조합한 단어들을 기억하는 식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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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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