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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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비핵화는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nuclear state)으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에선 북한 비핵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등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미국이 북한 비핵화라는 불가능한 목표에 매달리기보다 미국 본토 방어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대북 정책을 내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美서 커지는 비핵화 포기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는 미국의 북한 비핵화 목표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다룬 여러 기고문이 동시에 실렸다. 북핵 6자회담 부대표를 지낸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기고에서 “비핵화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며 “워싱턴은 이제 북한의 핵 무장을 해제한다는 전략에서 벗어나 미국의 안보를 강화할 수 있는 즉각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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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이지만 낯설지 않은 구상들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에 군축협상을 의미하는 ‘중간단계(interim steps)’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한국과 일본엔 핵 억지력 협력을 위한 새로운 협의체 창설을 타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해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회동을 제안하며 북핵 인정과 대북제재 해제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해 12월 내놓은 최상위 안보 전략 문서인 국가안보전략(NSS)에선 다른 적대국과 달리 북한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고, 최근엔 전작권 전환과 맞물려 주한미군 규모와 역할 조정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 조야에서 나오는 비핵화 포기론이 가리키는 방향은 ‘차가운 평화(cold peace)’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되 충돌을 막는 현상 유지 전략이다.
북한도 미국을 향해 같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김 위원장은 2월 노동당 9차 대회에서 대외 정책 방향을 밝히며 “대조선(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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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비핵화 불가론은 더는 금기가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 1월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비핵화가)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느냐”며 “그건 아주 엄연한 현실”이라고 했다. 비핵화가 어려워진 현실에 맞춘 실용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정작 정부에서 거론되는 대북 정책은 온통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맞춰져 있다. 비핵화를 포기하면 북한이 한국과의 대화에 나설까. 하지만 핵을 보유한 북한에 대한 외교적·군사적 지렛대를 어떻게 확보할지, 미국의 군사적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비핵화의 실패는 압박과 유화책 모두의 실패로 봐야 한다. 장밋빛 평화 만능론은 실용을 가장한 또 다른 이상주의다.
문병기 정치부장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