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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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역사작가
당시 상하이는 열강의 조차(租借) 지역인 ‘조계(租界)’로 나뉘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에 자리 잡았는데, 이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한 공공 조계의 치안력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도피처는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의거 때문이었다.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이 행사장 단상을 강타했다.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데이지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했고, 노무라 제독, 우에다 장군, 시게미쓰 공사 등 일본 군정 핵심 인물들이 중상을 입었다.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폭탄을 윤봉길에게 건네줬다는 상하이교민단장 이유필을 잡기 위해 즉각 프랑스 조계로 경찰을 보냈다. 프랑스 측은 일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줬다. 일본 경찰과 프랑스 형사가 이유필의 집을 덮쳤으나 그는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들은 이유필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잠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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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작은 실수에서 비롯됐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극비리에 진행됐다.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는 거사 직후가 돼서야 안창호에게 피신하라는 전갈을 보냈고, 이유필 역시 그제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안창호는 이 급보들을 모두 받지 못했다. 연락병이 안창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이유필의 집으로 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창호가 이유필의 집을 찾은 이유는 어린이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틀 후인 5월 1일 어린이날(당시 5월 첫 번째 일요일) 체육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이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던 그는 상해한국소년동맹회 회장이자 이유필의 아들인 이만영을 만나러 그 집을 찾았다.
항간에는 안창호가 거사 사실을 알고도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체포를 감수하고 감시 중인 집을 찾은 것이라는 미담이 떠돌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안창호는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모하게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극적인 미담을 만들려는 의도가 자칫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판단력을 폄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안창호의 체포는 조국의 미래인 소년들을 챙기려던 따뜻한 마음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얄궂은 우연이 겹친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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