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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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 작가·‘영국정원일기’ 저자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들도 기억에 담기면 부드럽게 풀리고, 찰나에 잊힌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지? 뒤늦게 알아차리면 다행이지만, ‘왜 그때 우리 거기서 물놀이했잖아’라고 시간과 장소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는 사람 앞에서마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참 난감하다. 중요한 것들을 담고 지켜주리라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기억에 기댈 수가 없다. 서울로 대학을 간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 봉지는 혹시라도 샐까 봐 끝이 여러 겹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과거의 조각들은 기억이 그 끝을 단단히 묶어주지 못한다. 스르륵 풀리고 새어 버린다.
나오코의 부탁은 와타나베가 미래에도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 달라는 당부가 아니라, 당신에게서 잊히지 않기를 원하는 ‘지금’의 자신을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결국 잊힌다고 해서 기억되기를 원하는 지금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욱 ‘지금’에 기댄다. 좋은 봄날, 주변에는 꽃들이 가득하다. 내일 내리는 봄비에 시들더라도, 활짝 피어난 지금은 연약하나 분명히 존재한다. 꼭 기억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 틈조차 없도록 눈을 크게 뜨고, 당장 오늘 피어 있는 꽃잎에 그려진 짙은 보랏빛의 선들을 본다.
김민호 작가·‘영국정원일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