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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의 메디컬리포트]모호한 ‘12대 중과실’ 기준, 의료분쟁 늘리는 역효과 낼 수도

입력 | 2026-04-23 23:09:00


지난달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료분쟁 조정 법안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이 해당 법안이 의료 현장에 미칠 영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의료계는 “법안이 통과되면 의료 현장의 방어 진료와 고위험 수술 기피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 제공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의료사고 피해 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두고 의료 현장에선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이번 법안이 의료사고 분쟁 시 필수의료진의 형사 처벌 부담을 완화해 줄 것이라고 공언한다. 대한의사협회도 정부와 의견이 비슷하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법률인 만큼 향후 시행령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자는 의견이다.

하지만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신경과 등 22개 전문과 법제이사가 법안의 세부 내용을 살펴본 결과 “‘의료 행위의 형사 범죄화’를 가속화하고 변호사들에게 전례 없는 블루오션을 열어 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각 전문과는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속속 내고 있다.

의료계가 지적하는 내용 중 하나는 형사 처벌 특례의 예외 조항인 ‘12대 중대 과실’ 항목의 탄생 배경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이 리스트는 최근 5년간 국내에서 발생한 의료사고 형사 판례들을 기계적으로 수집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법안 설계 과정의 근본적 모순을 보여 준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의료사고의 형사 기소율이 높은 나라다. 선진국에서는 고의에 가까운 중대한 과실이나 무지에 의한 과실만을 형사 처벌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는 민사적 손해배상으로 해결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사가 최선을 다한 진료의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우는 잘못된 관행이 이어져 왔다. 이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의 핵심 원인이었다. 의료계는 이번 개정안이 이런 잘못된 판례들을 한데 모아 중과실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법안에 담긴 중대 과실 중 ‘예측 가능한 위험에 대한 진단·처치·모니터링 소홀’과 같은 조항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거의 모든 의료사고에서 ‘주의 의무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중과실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기소의 고속도로’를 깔아 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

법안에 따르면 필수의료 사고나 형사 입건된 사건은 신설되는 ‘의료사고심의위원회’로 보내져 12대 중과실 여부를 판단받게 된다. 겉으로는 전문가 심의를 거치는 안전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심의위가 모호한 12대 중과실 잣대를 들이대면 과거에는 민사로 끝났을 사안들조차 ‘중과실’이라는 낙인이 찍혀 검찰로 직행한다. 의사 입장에서는 형사 면책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식적인 ‘중과실 인증’을 받고 기소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마주할 수 있다. 이는 의료 현장의 방어 진료를 부추기고, 고위험 수술 기피가 확산되는 촉매가 될 수 있다.

환자와 보호자의 의료사고 대응도 달라질 수 있다. 현장에선 중병 치료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을 지급한 보호자들이 보상을 극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찾으려 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교통사고에서도 12대 중과실 여부가 합의금 액수를 결정하듯, 의료사고에서도 ‘중과실 판정’은 곧 고액의 보상금을 받고 법적 우위를 점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법이 이대로 시행되면 환자들은 사건을 가능하면 심의위원회로 보내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필수의료 사건은 자동 송부되지만, 비필수의료 사건의 경우 일단 의사를 형사 고소해 심의위의 판단을 끌어내는 방식이 성행할 가능성도 의료계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조정 단계부터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 법조계로서는 새로운 거대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의료의 본질인 ‘치유’보다는 ‘법리적 싸움’에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비극적 풍경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의사는 언제든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위험에 노출되고, 환자는 보상을 위해 소송의 늪에 빠져들며, 법률 전문가들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이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필수의료를 살리고 싶다면 22개 전문과가 지적하는 12대 중과실 규정을 다시 한번 검토해 시행령에라도 반영해야 한다. 의료 행위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형사 처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해 민사 보상 체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법안의 문구 하나가 생사를 다투는 수술실 현장에 앞으로 어떤 찬바람을 몰고 올지 걱정이 앞선다. 필수의료진에게 필요한 것은 허울뿐인 법적 면책이 아니라 소신껏 진료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이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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