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복궁 내 총독부 박물관 건립… 기존 석탑, 건물도 야외전시로 연결 ‘이제 사라진 조선’처럼 보이게 해 구 총독부 청사에는 과학관 조성해… 과학-기술 조선에 하사한다는 상징 과거-미래 지배 의도 고스란히 담겨
1915년 경복궁 내 개관한 총독부 박물관(원 안). 전국에서 수집한 석물은 물론이고 근정전, 경회루 등 궁궐 건물까지 야외 전시물처럼 연출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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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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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통치에 활용된 경성 박물관
오래된 유물을 수집, 보존하고 전시하는 박물관은 현대 도시의 필수적인 문화·사회교육 시설이다. 경성에서 박물관의 효시는 통감부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편하면서 자경전 터에 건립한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다. 총독부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부터 정식 총독부 박물관을 건립하려고 계획했다. 》
총독부 박물관은 1915년 12월 1일 개관했다. 위치는 경복궁 내 근정전과 동문인 건춘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기존의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전용했다. 공진회 전시관은 앞서 9월에 열린 행사가 끝난 후 철거할 예정인 임시 가건물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은 처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장중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10여 개의 전시관 건립 예산이 총 24만여 원이었는데, 그중 미술관 건립 예산에만 7만여 원이 책정됐다.
총독부 박물관의 설계자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일 가능성이 높다. 대만총독부 기사로 근무한 노무라는 대만총독부 박물관(현 대만국립박물관)을 설계했는데, 두 박물관은 평면이 유사하다. 노무라는 총독부 신청사 설계를 맡았던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4년 사망하자 청사 설계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일제가 경복궁에 지은 건물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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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종합박물관 투시도 공모 당선작.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3·1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 사이 조선 사회의 실력 양성을 위해 과학,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사회적 열망이 고조됐다. 1924년 일본 와세다대 유학생이었던 이헌구(1905∼1982)는 ‘금일의 조선과 자연과학의 사명’이라는 기고문에서 “금일의 위기를 벗어나서 남과 같은 문명을 건(建)하며 부강을 치(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연과학을 학(學)하여야 하겠으며 자연과학을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24년 4월 21일)
한편 청사 신축·준공이 임박하면서 총독부는 남산 자락 구 청사의 이용 방안을 고민했다. 마침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관이 옛것을 전시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당대사 박물관’ 설립 붐이 일고 있었다. 총독부는 1925년 독일 뮌헨에 개관한 공업 박물관인 독일박물관(Deutsches Museum)의 사례를 참조해 구 청사를 과학·기술 박물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문화 통치를 표방한 식민지 권력이 조선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갖춘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7년 5월 10일 다이쇼(大正) 천황 결혼 기념일에 맞춰 은사(恩賜)기념과학관이 개관했다. ‘은사’란 ‘천황의 은혜’라는 의미이다. 미래의 발전을 지향하는 과학을 마치 천황이 조선에 하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이름에 상징성을 담은 것이다.
1927년 옛 총독부 청사를 활용한 은사기념과학관. 과학, 즉 미래를 마치 천황의 하사품처럼 보이게 이름을 붙였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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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전시실은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과시하는 전시물로 채워졌다. 일례로 토목건축실을 보면 병합 이후 새롭게 건설한 교량이나 항구의 사진, 모형을 전시하고 건설에 적용한 신기술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1925년 대홍수 이후 한강 개수 모형,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한 인천항의 갑문 모형, 새롭게 정비한 부산항의 부두 단면도 등을 전시했다. 조선인의 ‘활약’은 마지막 코스인 동물·식물실, 조류실에 가서야 볼 수 있다. 박물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거의 유일한 과학 분야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데다가 상대적으로 고가의 장비 없이 개인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관이 개관하면서 총독부 청사 뒤편으로 조선의 과거를 보여주는 총독부 박물관, 이전 청사에는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은사기념과학관 등 박물관 축이 완성됐다.
1920년대 초부터 박물관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1922년 3월 도쿄제대 교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조선을 방문했다. 근대적 연구 방법에 의해 일본 고중세사 연구를 제도화한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구로이타는 조선의 고적 조사나 역사 편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 권위자였다. 그는 조선과 일본의 역사적 친연성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장치인 총독부 박물관을 대폭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실제 확장 계획도 세워졌으나 이듬해 간토대지진으로 인한 재정난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총독부는 1929년에도 박물관 확장 계획을 세웠지만 대공황의 여파로 무산됐다.
1935년에는 이른바 ‘총독부 시정 25주년’을 기념해 박물관의 확장을 넘어 은사기념과학관까지 합병한 ‘종합박물관’ 건립 계획이 수립됐다. 경복궁 내 새롭게 미술박물관과 과학박물관을 신축하고 기존 총독부 박물관은 자원관으로 해 미술, 과학, 자원의 3관으로 구성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일반 역사박물관, 과학관, 자연사박물관을 하나로 합쳐 거대한 박물관 단지를 만들려는 구상이다. 그러나 대강의 설계까지 나온 종합박물관 계획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지부지됐다. 오히려 총독부 박물관은 1945년 미군의 폭격이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오자 전시물을 경주박물관, 부여박물관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소개(疏開)했다. 결국 총독부 박물관은 텅 빈 채 광복의 날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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