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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TV를 삼켰다…헝가리 ‘포퓰리즘 원조’의 몰락[딥다이브]

입력 | 2026-04-16 10:00:00


‘민족주의 포퓰리즘’의 원조가 결국 무너졌습니다. 12일 헝가리 총선에서 야당인 티서당이 압승하면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16년 만에 물러나게 됐죠. 유럽 극우 정당과 미국 마가(MAGA) 세력에 영감을 줬던 선구자의 극적인 몰락입니다.

입법·사법·언론은 물론 재계까지 장악하며 장기집권의 공고한 성을 쌓았던 오르반 정권. 하지만 반시장적 포퓰리즘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며 민심은 돌아섰고요. 시대가 바뀌면서 더 이상 구식 프로파간다도 통하지 않게 됐는데요. 오르반의 참패가 남긴 교훈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총선 부분 개표 결과가 발표된 뒤, 페테르 머저르 티서당 대표가 국기를 흔들고 있다. 티서당은 의석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며 16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AP 뉴시스

*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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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오르반노믹스
138석(티서당) 대 55석(피데스당). 4월 12일 치러진 헝가리 총선은 야당 티서(Tisza)당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16년 만의 정권 교체이자, 티서당이 단독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3분의 2 이상)까지 차지한 거죠. 앞서 네 차례 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던 여당 피데스(Fidesz)당의 참패입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르반 정부는 이번에도 총선을 앞두고 필살기를 발휘했습니다. 달콤한 선심성 정책을 마구 쏟아냈죠. 공공요금 인하, 연 3% 고정금리의 주택담보대출 출시, 공무원에 연 100만 포린트의 주택 보조금(480만원) 제공, 세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한 평생 개인소득세 면제, 휘발유·경유 가격 상한제까지. 서민을 위하는 정부라는 이미지로 어필하려 했는데요.

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죠. 당장 달콤한 그 혜택들이 사실은 미래 성장을 갉아먹는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요.

총선이 치러진 1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 국기를 흔드는 티서당 지지자. AP 뉴시스



2020년대 초까지 헝가리는 유럽에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모범사례로 통했습니다. EU에서 가장 낮은 법인세(9%)를 무기로 외국 제조업체의 생산기지(독일 자동차, 한국과 중국 배터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요. 대대적인 공공 근로 프로그램을 통해 실업률을 3%대로 끌어내렸죠. 또 외국 자본이 보유한 통신·금융·교통·유통기업엔 ‘특별세’를 부과해 국가 재정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못 견딘 외국기업들이 떠나면서 전략산업이 속속 헝가리 기업으로 넘어갔고요. 무엇보다 파격적인 출산 장려 정책(세 자녀는 주택담보대출 원금 전액 탕감)으로 그 어렵다는 출산율 반등에까지 성공했어요. ‘외세(EU)를 배격하고 경제 주권을 되찾겠다’던 오르반 총리의 독창적 전략이 통하는 듯했죠.

하지만 2022년을 기점으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그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야당 지지율이 들썩거리자 오르반 정부는 대대적인 현금 살포 정책을 펼쳤어요.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 2021년 낸 소득세를 전액 환급해줬고, 연금 수급자에겐 월 지급액의 100%를 추가로 얹어줬죠(이른바 ‘13개월차 연금’ 지급). 청년들엔 소득세를 면제해주고, 군인·경찰엔 특별 보너스를 제공했어요. 이렇게 수조 원을 뿌린 덕분에 오르반 정권은 총선에선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재정적자는 한층 불어나고 말았죠. 팬데믹이 끝나고 재정을 재정비해야 할 시기에 거꾸로 간 겁니다.

이 총선 직후 EU 집행위원회는 헝가리에 대한 지원금 지급을 동결했습니다. “공공 조달 절차의 심각한 체계적 부정행위”가 이유였죠. EU 기금 중 상당 부분이 오르반 총리 가족과 측근이 운영하는 기업으로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오르반 정권의 장기집권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시스템이었으니까요.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공공조달 계약과 국가 보조금을 자신의 가족과 친구, 측근 기업에 몰아주는 방식으로 친정부 대기업을 키웠다. 이런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마피아 국가’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EU가 수십억 유로의 지원금을 동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진은 지난 1월 연례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오르반 총리. AP 뉴시스



선거 승리를 위해 돈은 잔뜩 풀어놨는데, EU에서 들어올 외화는 막혔으니. 외환시장은 뒤집어졌죠. 포린트화 통화가치는 채 1년도 안 돼 30% 넘게 급락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했죠. 그 여파로 유럽 전역에 인플레이션이 닥쳐왔는데요. 통화가치가 폭락한 헝가리는 최악의 물가고에 처합니다. 2023년 초 헝가리의 연간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무려 25%. 계란·빵·버터·치즈 같은 식품 가격은 1년 만에 50~60%씩 뛰었어요. 임금보다 물가가 훨씬 더 빠르게 오르면서 중산층과 서민들은 실질임금이 깎이며 급속히 가난해집니다.

헝가리의 미친 물가는 학교와 병원까지 덮쳤어요. 고물가와 낮은 처우에 항의해 교사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다 해고되는 사태가 벌어졌고요. 생활고에 처한 의사들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지방병원 응급실과 분만실이 속속 폐쇄됩니다. 민생의 기본 인프라까지 무너진 거죠.


냉장고가 텅 비었다
2025년 헝가리 경제성장률은 0.4%. 인근의 폴란드(3.6%)는 물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비교해도 한참 뒤집니다. 특히 가난한 이웃나라로 여겼던 루마니아마저 1인당 GDP에서 헝가리를 추월하면서 헝가리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죠.

다른 경제 성적표도 처참합니다. 2025년 재정적자는 5.7조 포린트(약 27조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요. 국가부채는 2년 연속 늘어서 GDP 대비 74.6%로 불어났죠. 한동안 자랑했던 ‘완전 고용’은 이제 옛말이 됐고, 2026년 2월 공식 실업률은 4.8%로 10년래 최고를 찍었습니다.

지금의 경제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은 병원인데요. 예산 고갈로 병원엔 기본 의료 소모품마저 동나서 거즈, 소독약, 화장지까지 환자가 준비해야 할 지경이고요. 수술을 하려면 1~3년, 외래진료도 6개월이나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의료 시스템이 붕괴됐습니다.

오르반 집권 이후 헝가리 출산율의 추이. 2021년 1.61명까지 출산율을 끌어올리며 세계적 모범사례로 통했지만, 경제가 고꾸라지면서 출산율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국 카토연구소


이렇게 쪼들리는데 출산율이 오를 리가 없겠죠. 2021년 1.61명까지 높아졌던 출산율은 이후 해마다 낮아져 2025년 1.31명으로 추정됩니다. 오르반 정권이 대대적인 출산장려정책을 내놓기 전인 2009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거죠. 정부가 GDP의 5.5%라는 막대한 예산을 가족정책에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허무한 결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경제였던 거죠. 어느 정부든 경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리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펼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한들 말이죠.

‘TV와 냉장고의 싸움’. 과거 러시아에서 선거판을 설명하며 나온 표현이죠. 정치적 선전(TV)과 국민의 경제적 현실(냉장고) 중 어느 게 승리하느냐에 선거 결과가 좌우된다는 뜻인데요. 전 주헝가리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레스먼은 이번 헝가리 총선 결과를 두고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반 정권이) TV와 냉장고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게 됐습니다. 시민이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면서 총리가 호화로운 시골 저택에서 희귀동물(얼룩말)을 키운다면 선전 활동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죠.”


TV를 무력화한 스마트폰
헝가리는 언론 산업 대부분을 정부가 사실상 장악한 나라입니다. 오르반 총리는 취임 직후부터 친정부 언론사엔 정부 광고비를 몰아주고, 독립 언론엔 벌금을 물리는 식으로 입맛에 맞게 시장을 재편했죠. 이 과정에서 많은 언론사가 오르반 총리 측근 기업 소유로 넘어갔고요. 아예 친정부 성향 매체 500개를 묶어 관리하는 ‘중부유럽 언론 미디어 재단’이란 재단이 생겨났을 정도인데요. 인쇄 매체와 라디오 시장의 80% 이상, TV 시장의 57%가 정부의 관리 아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헝가리 언론매체는 사실상 정부 기관지 노릇을 해요. 일간지들의 헤드라인 제목과 사진이 모두 똑같을 정도죠. 편파보도는 당연합니다. 2025년 국영방송 MTVA 뉴스 방송의 약 4분의 3을 집권여당이 차지했다고 하죠. 애초에 공정한 게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헝가리 친정부 매체들은 선거전 초반부터 야당 티서당 대표인 페테르 머저르를 ‘가정폭력범’, ‘배신자’, ‘자기애적 인격장애(나르시시스트)’로 몰아갔어요. 머저르는 브뤼셀(EU)의 꼭두각시일 뿐이며, 정권이 바뀌면 헝가리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끌려갈 거란 흑색선전이 난무했죠.

오르반 정부가 선거를 앞두고 머저르를 비방하기 위해 만든 옥외광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페테르 머저르 티서당 대표. 그는 이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며 이렇게 받아쳤다. “이 걸작을 가까이서 한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르반 정부가 병원용 소독제 대신 납세자들의 세금을 여기에나 쓰고 있으니 말이다.” 머저르 공식 페이스북



예전 같으면 이런 대대적인 언론 공세에 야당은 속절없이 당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2026년의 선거판은 달랐죠. 이제는 TV(정부의 일방적 선전)와 냉장고(국민의 실제 삶)의 일대일 싸움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디지털 미디어)이란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으니까요.

디지털 미디어는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고요. 45세의 페테르 머저르는 디지털 콘텐츠의 문법을 아는 사람이었죠.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직접 관리하며 민첩하게 소통했는데요. 예컨대 자신을 겨냥한 가짜뉴스나 딥페이크 영상이 나오면 바로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실시간으로 반박했고요. 하루 5~6곳을 돌며 강행군하는 유세 현장도 SNS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했어요.

특히 머저르와 그 지지자들은 흑색선전까지 밈(meme)으로 유머러스하게 역이용했는데요. 머저르가 작은 보트 위에서 춤추는 틱톡 영상이 그 예이죠. 친정부 매체가 자신을 춤추고 술 마시며 놀기 좋아하는 인간이라며 깎아내리자 ‘그래, 나도 춤추고 놀 줄 아는 보통 사람이다’라며 받아치는 듯한 영상을 찍어 올렸어요. 오히려 젊고 열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결과가 됐죠.

티서당은 지지자들의 결집과 소통을 위한 플랫폼인 ‘티사 월드’ 앱을 운영했다. 흑색선전에 대한 반박용 카드뉴스 공유, 자기 동네의 정부 부패 사례 제보, 오프라인 유세 정보 제공의 통로가 됐다. 머저르 공식 SNS



머저르와 티서당은 단순히 SNS만 잘한 것이 아니라, ‘티서 월드’ 라는 독자적인 플랫폼을 운영했습니다. 머저르에 대한 가짜뉴스가 나오면 바로 앱이 푸시알람을 띄우고 반박용 카드뉴스를 즉시 공유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죠. 실시간 팩트체크로 언론매체의 흑색선전을 무력화한 겁니다.

젊은 인플루언서들도 영향력을 발휘했어요. 21세 틱톡커 오시카 칼라이가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개인 일상을 공유하며 인기를 끌었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우리의 한 표가 중요하다. 우리 세대가 헝가리를 바꿔야 한다”면서 젊은 층의 투표를 독려했고요. Z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 총선의 높은 투표율(79.5%)과 야당의 압승을 이끈 원동력이 됐죠.

결국 이번 선거는 일방적인 프로파간다(TV)와 참여형 쌍방향 소통(스마트폰)의 대결이었고요. 당연히 스마트폰의 완승이었습니다. 역대급 홍보 예산을 쏟아부어 TV와 라디오, 신문, 옥외 광고판을 도배하고도 오르반 정권이 패배한 이유죠.

전 세계가 주목한 헝가리 총선은 화려하게 막을 내렸지만, 이 나라의 실질적 변화까지 갈 길은 멉니다. 경제 권력은 여전히 오르반 총리의 측근들이 쥐고 있고, 약속한 공약(교사 임금 인상, 의료 시스템 복구 등)을 이행하기엔 정부 곳간이 텅 비었죠. ‘연료비가 3배로 치솟고, 연금이 깎이고, 세금이 뛸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국민들도 많고요. 16년 만의 정권교체가 헝가리의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4월 15일(수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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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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