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노리는 日 반도체 1988년 세계 1위 반도체 생산 국가… 80년대 美-日 반도체협상에 무너져 日, 2030년까지 공적자금 집중투자… 반도체 재건 목표 ‘라피더스’ 육성 고성능 낸드플래시 가격 고공행진… 세계 점유율 3위 ‘키옥시아’ 주목
게티이미지뱅크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올해 1월 신년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처럼 말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반도체를 ‘경제 안보’의 영역에 올려두고 적극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1990년만 해도 세계 반도체 제조사 매출 상위 10개사 가운데 일본 기업만 6곳에 달했지만, 2025년 기준으로는 일본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의 경제 정책, 이른바 ‘사나에노믹스’는 과거 세계 시장을 휩쓸었던 일본 반도체 산업을 재건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공급망 교란, 지정학 갈등 등의 대외 위협으로부터 경제를 지키고 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 정부가 반도체 제조 능력 확보를 선택한 셈.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인공지능(AI)·반도체 산업 기반 강화를 위해 10조 엔(약 91조7000억 원) 이상의 공적 지원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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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반도체는 ‘후발 주자’였다. 1970년 미국 인텔이 D램을 개발한 후 뒤따라 나선 일본은 파나소닉, 히타치, NEC, 도시바, 후지쓰 등 일본의 이름난 전자 대기업을 중심으로 D램 자체 개발과 사업화를 추진했다.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1970년대 일본 정부는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위한 신산업으로 반도체 산업을 점찍고 ‘초LSI기술연구조합’을 중심으로 연구개발(R&D) 중복 투자 방지, 노하우 공유, 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 육성 등을 지원했다. 기업은 정부 지원으로 반도체 투자를 지속해 우수한 공정 수율과 저렴한 단가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달러화 대비 낮은 엔화 가치에 힘입어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미국의 견제가 시작됐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1985년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통상법 301조 위반 혐의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청원서를 제출했다. 인텔 창업자인 로버트 노이스도 USTR에 일본 반도체 산업 정책의 불공정성을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미국의 마이크론은 일본 반도체 기업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등을 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에 보복 관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1985년 미국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체결된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뛰어오르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린 일본 기업의 반도체 경쟁력은 약화됐다. 1986년에는 일본 반도체 기업이 미국에 생산 원가를 공개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높이기로 하는 미일 반도체 협정이 결정타를 날렸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에 따르면 1988년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은 일본이 1위였으나 1992년부터 급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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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반도체 재건의 중심, 라피더스
일본 홋카이도 지토세에 건설 중인 라피더스 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조감도 사진. 출처 라피더스 홈페이지
라피더스는 2022년 도요타, 소니, 키옥시아, NTT, 소프트뱅크, NEC, 덴소,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 주요 기업 8곳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다. 다카이치 총리는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일본을 반도체 강국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국가 프로젝트”로 라피더스를 소개하며 “일본이 2나노미터급 첨단 반도체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라피더스를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첨단 산업 프로젝트”라며 정부 보조금과 출자, 채무보증을 통해 대규모 지원에 나섰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약 2조9000억 엔(약 27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또 2030년까지 AI·반도체 분야에 10조 엔(약 90조 원) 이상을 공적자금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물량 공세에 나선 것.
라피더스의 목표는 기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공정 수준이 4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상황을 넘어 ‘2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기술을 확보하고 2027년 양산에 돌입하는 것이다. 차세대 초미세 공정인 2나노는 AI 반도체 등 고성능 칩에 적용되는 기술로 반도체 업계에서는 2나노 공정이 향후 반도체 주도권을 좌우할 핵심 기술로 꼽힌다. 삼성전자와 TSMC가 지난해 말 2나노 공정 양산을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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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TSMC의 일본 내 공장 건설에 2021년부터 2024년까지 1조2000억 엔(약 11조3000억 원) 가까운 금액을 쏟아부었다. 미국 기업 마이크론에는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7745억 엔(약 7조3000억 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 금액에는 지난해 11월 반도체·AI 추가 지원 예산 5360억 엔(약 5조 원)이 포함돼 있다. 마이크론은 2029년까지 총 1조5000억 엔을 투자해 히로시마 공장 생산 라인 등 설비를 증강할 계획인데,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들도 일본에 미래 첨단 반도체 생산 시설을 확충하며 화답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TSMC는 내년 하반기(7∼12월) 가동을 시작할 규슈 구마모토현 2공장에서 3나노 공정 제품을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TSMC는 현재 구마모토현 제1공장에서 12∼28나노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제2공장에서는 원래 6∼12나노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었지만 공정 수준을 전격 상향 조정했다.
현재 일본 내에는 2나노는 물론이고 3나노 제품 생산 거점도 없다. 일반적으로 나노미터 수치가 작을수록 더 첨단 공정을 의미한다. 2나노가 이제 막 시작된 ‘미래의 기술’이라면, 3나노는 현재 최고의 성능을 내는 현역 첨단 기술이다. TSMC의 공정 수준 상향 조정으로 설비 투자액은 기존 122억 달러(약 17조8000억 원)에서 170억 달러(약 24조8000억 원)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요미우리가 전했다.
● “2034년까지 10년간 262% 성장”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D램을 넘어 낸드플래시로 확산되고 있는 흐름도 일본에는 긍정적이다. AI 산업은 이제 기존 데이터 학습 단계를 넘어 실제 사용자들의 요청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추론’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추론 시장에서는 HBM의 연산 지원 능력과 더불어 방대한 데이터를 담아뒀다가 빠르게 읽어올 수 있는 고성능 스토리지인 낸드플래시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낸드플래시 가격은 고공행진 중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낸드 범용 제품인 128Gb의 평균 거래가격은 9.46달러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5.74달러에서 3.72달러 오른 것으로, 상승률은 65%에 달한다.
전 세계 낸드플래시 생산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점유율 3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 일본의 키옥시아다. 키옥시아는 12일 2025 회계연도 3분기(10∼12월)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8% 증가한 5436억 엔,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17.6% 증가한 1447억 엔이었다고 발표했다. 키옥시아는 “매출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으며, 영업이익은 시장 전망치를 웃돌았다”고 설명했다.
이민아 기자 om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