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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양환]트럼프 시대, 슈퍼볼 무대 선 라틴계 가수

입력 | 2026-02-11 23:15:00

정양환 문화부장


“슈퍼볼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controversial) 하프타임 쇼.”(미국 CBS뉴스)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챔피언결정전 슈퍼볼이 8일(현지 시간) ‘무탈하게’ 끝났다. 경기 전후반 사이 여는 공연이 이리도 큰 정치적 파장을 일으킨 적 있던가. 현직 대통령까지 보이콧을 공언할 정도로.

푸에르토리코 가수 배드 버니(Bad Bunny)가 헤드라이너를 맡은 올해 슈퍼볼은 발표 때부터 시끄러웠다. 미 최고 스포츠 이벤트에서 스페인어로만 노래하는 가수라니, 보수 진영이 질겁했다. 지난해 흑인 래퍼 켄드릭 라마의 공연도 불쾌해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엔 참지 않았다. 불참 선언 뒤 우익단체 ‘터닝포인트USA’가 훼방 놓고자 마련한 ‘올 아메리카 하프타임 쇼’를 시청하겠다고 했다.

논란은 웬만큼 예견됐던 일이다. 배드 버니는 트럼프 정부의 이민 정책에 대놓고 반기를 든 아티스트 중 하나. 1일 미 그래미에서 대상 격인 ‘올해의 앨범’을 거머쥐기도 했던 그는 주저 없이 “ICE OUT(이민세관단속국 아웃)”을 외쳤다. 하프타임 쇼에서 어린이에게 그래미 트로피를 안긴 퍼포먼스도 ICE에 구금됐던 에콰도르 출신 다섯 살 소년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정체성 잊지 않는 서른두 살 래퍼

NFL은 왜 배드 버니를 슈퍼볼 무대에 세웠을까. 일단 2020년 이미 하프타임 쇼에 나와 검증된 경력자다. 뭣보다 국내에선 반향이 적지만, 명실공히 현시점 ‘최고의 스타’다. 그는 글로벌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 2020∼2025년 4번이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올해의 가수’로 선정됐다. 숱하게 빌보드 정상에 올랐으며, 그래미상도 여섯 차례 받았다.

배드 버니가 사랑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라틴 트랩의 왕(King of Latin Trap)’으로 흥겨운 라틴 리듬에 절묘한 스페인어 랩을 버무린다. 영어를 할 줄 알지만 “난 스페인어로 꿈꾸고, 사랑한다. 그 정체성을 버리는 건 내 음악을 죽이는 짓”이라 했다. 자기 색깔을 꿋꿋이 지키는 태도에 팬들은 더 열광했다. 하프타임 쇼에 꾸민 무대는 고향의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흥미로운 건, 현지에서 배드 버니는 K팝과 자주 비견된다. 미국을 강타한 비주류 음악의 양대 산맥인데 ‘접근법’이 다르다고 짚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배드 버니가 발음마저 고국 억양을 살리는 ‘노스탤지어(nostalgia)’로 성공했다면, K팝은 북유럽 작곡가와 북미 안무가 등을 유입해 ‘국경을 초월한 협력’으로 문을 열었다”고 했다. 배드 버니가 미국 스타일을 벗어나려 했다면, K팝은 미국 트렌드에 스며들려 했단 얘기다.

누군가의 혐오에 맞서는 방법

K팝이 살짝 밀린 감도 들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미국은 인구의 약 5분의 1이 라틴계다. 라틴음악은 원래도 현지에서 친숙했다. 하프타임 쇼에 섰던 첫 라틴 가수는 1992년 글로리아 에스테판. 무려 34년 전이다. 게다가 산타나와 리키 마틴 등 선배들이 영어로 노래하며 발판을 다져왔다. ‘강남스타일’이 K팝 붐을 일으킨 건 겨우 14년 전이다.

그보단 대통령까지 맹공을 퍼붓는데도, 방탄소년단(BTS) 진보다 두 살 어린 젊은이의 의연함을 눈여겨보자. 슈퍼볼 직전, 많은 이들은 배드 버니가 반대 세력에게 어떻게 반격할지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내 공연은 스페인어를 몰라도 된다”며 “대신 춤을 배워 오라. 함께 즐기는 파티일 테니”라며 일축했다. 그리고 메인 전광판엔 이런 문구를 내걸었다.

“The only thing more powerful than Hate is LOVE(혐오보다 더 강력한 유일한 한 가지는 사랑이다).”

마침 3월 컴백하는 BTS의 새 앨범 제목은 ‘아리랑’이다. 뭐가 소중한지, 청년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정양환 문화부장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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