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물가안정 필요로 각국 나서… 1910년대 말 경성에도 처음 개설 공설시장 ‘일본인 시장’ 이미지… 전통시장 이용 관행에 일부 실패 전시하 배급 체계로 기능 확대돼… 광복 이후 일부 시장 명맥 이어져
1919년 경성 최초의 공설시장인 명치정시장의 전경. 현 서울 중구 명동2가 일대로, 일제는 폭등한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공설시장 제도를 도입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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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도입된 공설시장 제도
근대 초기 산업도시가 발달하면서 행정기구가 직접 개설하고 관리하는 공설시장이 유럽에서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파리는 1854년 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33개의 공설소매시장이 문을 열었다. 독일 베를린에선 1886년 처음 공설시장이 들어선 이후 1910년대까지 총 14개가 개설됐다. 미국도 1910년대부터 도시 공설시장을 개설했다. 일본 역시 1900년 전후 도시 물가를 안정시킬 필요가 커지자 공설시장 제도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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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병합 이후 총독부는 조선의 도시 지역에도 일본식 공설시장 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기존의 뿌리 깊은 상거래 질서를 무시한 채 공설시장을 개설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결국 1914년 ‘시장규칙’을 공포해 다양한 형태의 시장을 통제하는 방식을 택했다.
시장규칙은 시장을 네 종류로 구분했다. 3호와 4호 시장은 각각 경매시장, 주식(곡물)거래소였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시설이었다. 일반적인 시장에 해당하는 1호 시장은 지방의 장시(5일장)나 경성의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처럼 조선 후기부터 형성된 대도시의 상설시장이었다. 2호 시장은 지방행정기구가 직접 개설해 관리하는 공설시장이었다. 이는 총독부가 도입하고자 했던 모델이다.
경성에서는 1910년대 말 첫 공설시장이 개설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과 조선 모두 도시 지역의 물가가 폭등해 여러 사회문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특히 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의 급등이 심각했다.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도시 지역 소매물가는 1907년을 100으로 할 때 1919년에는 259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3·1운동까지 겹치며 민심도 흉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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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설립된 화원정시장의 내부 모습. 장방형 건물에 긴 복도를 두고 양쪽에 점포를 배치한 일본식 시장 형태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922년에는 경정시장을 폐지하고 이를 남영동으로 이전해 용산시장을 개설했다. 경정이 철도로 가로막혀 있어 동쪽 신용산 주민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남영동은 전차 구용산선과 신용산선이 분기하는 지점으로 교통 여건이 뛰어났다. 북쪽 삼판통(三坂通·용산구 후암동) 일대에는 1920년대 초부터 조선은행 관사촌을 비롯해 일본인 상류층의 이른바 문화주택지가 형성되면서 시장 수요도 많았다.
공설시장은 장방형 건물에 긴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점포를 배치하는 일본식 시장 형태로 지어졌다. 지정된 판매자만 점포를 열어 영업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 위생 검사를 실시했다. 거래는 현금 결제와 정찰제를 원칙으로 했다. 그 결과 “공설시장이 설시(設市)된 후로는 얼마쯤은 보통 시가에서 사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또 공설시장에 가서 사면 물건의 가격도 비교적 통일이 있어서 아해가 가든지 어른이 가든지 정가의 틀림이 없는 고로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동아일보, 1920년 4월 24일).
그러나 종로시장은 영업 부진이 계속되자 1925년 폐지됐다. 이는 “종로공설시장은 1919년에 설치한 뒤로 대부분은 조선 사람에게 편리와 이익을 준다는 목적으로 조선 상인에게 가게를 빌려주어 조선 사람이 흔히 쓰는 일용품을 팔게 하였는데” “조선 사람은 동대문과 남대문 두 시장을 이용하는 마음이 역사적으로 오래 뿌리가 깊어서 많은 물건은 의례히 두 시장으로 가”는 관행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23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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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26년 마포시장(마포구 도화동), 1934년 서대문시장(서대문구 충정로2가)이 잇따라 개설된 것을 보면 종로 일대가 아닌 외곽 지역의 사정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공설시장이 ‘일본인 시장’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전통적인 대형 시장을 이용하기 어려운 외곽 주민들의 공설시장 개설 요구가 커졌던 것이다. 1940년 서대문구 영천동에 관동정시장이 증설된 것은 경성 서쪽 지역으로 주택지가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1936년 경성의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외곽 지역에 대한 도시계획이 추진되면서 공설시장도 개발 흐름에 따라 확산됐다. 1937년에는 영등포시장을 대폭 증설했다. 영등포는 1910, 20년대 조선피혁회사,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경성방직회사 등이 잇따라 들어서며 공업지대로 변모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조선 공업화 정책에 따라 가네보(鐘淵)방적, 동양방적, 대일본방적 등 일본계 회사의 대공장이 차례로 세워졌다. 당시 일본의 양대 맥주회사인 기린맥주와 대일본맥주도 현지 투자 형식으로 공장을 세웠다. 노동자 유입 등으로 인구가 늘자 기존의 시장을 증설하게 됐다. 영등포에는 1944년 제2공설시장도 들어섰다.
1940년대에도 공설시장은 계속 늘었다. 1941년에는 신당정시장과 효자정시장이 개설됐고, 1944년에는 돈암정시장, 혜화정시장, 북아현정시장이 문을 열었다. 신당정, 돈암정, 북아현정 공설시장은 도시계획 사업으로 추진된 외곽 지역의 구획정리와 맞물려 조성됐다. 당시 구획정리 계획을 보면 택지 개발과 함께 지구 안에 필수적인 도시 시설로 시장, 학교, 공원 등이 배치돼야 했다.
태평양전쟁기에 접어들며 물자 통제 정책이 강화되자 공설시장은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1942년 경성부는 공설시장 증설 구상을 발표하며 “전시하 생활필수품 배급의 원활을 기하여 총후 부민의 생활을 확보하고자 경성부에서는 일용품시장의 응급적 확충안을 세우고” “어디보다 인구가 조밀하면서 아직까지 시장의 설비가 없어 일상 필수품 배급이 원활치 못한 곳에 먼저 공설시장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매일신보, 1942년 12월 11일). 공설시장이 유통 기구를 뛰어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 배급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1922년 문을 연 용산시장의 현재 모습. ‘남영 아케이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100년 넘은 시장 건물 일부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사진 출처 염복규 교수 제공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