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시작이 반’이니 시작은 그냥 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요? 온갖 생각이 발목을 잡습니다. 시작을 잘하겠다는 생각부터 길을 막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다면 목적, 유용성 등을 시작도 하기 전에 따집니다. 그러다가 하지 않을 명분을 찾아냅니다.
미루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하기 싫어서, 가치가 없어서, 손을 댈 방법이 막막해서…. 얽혀 있는 감정만 살펴도 불안, 우울,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등입니다. 미루기는 자기 조절이 실패한 결과로 인지, 행동, 감정 영역을 모두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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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자신을 달래면서 미루지만, 결국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어버립니다. 미룬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지는 부담은 늘어나고 기운은 소모되며 몸과 마음이 활력을 잃습니다. 마감일의 ‘노예’가 됩니다.
미루기가 필요한 정상 발달 시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입니다. 망설이고 주저하기를 반복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신중한 판단이 필수적인 일에서도 미루기가 바람직합니다. 성급히 추진하기보다는 미루면서 실체를 파악하고 정보를 모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미루기를 성장을 위한 촉진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미루기와 연관해서 경험하는 심리적 만족감도 있습니다. 극복하고 싶다면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훈련’의 심리 공간으로 활용합니다. 미루기가 불가피하다면 열심히 살아 온 자신의 삶을 인증하는 상징으로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미루기를 극복하면 완벽주의의 벽도 같이 넘을 수 있습니다. 실패를 피하려고 미루지만 미루는 순간 그 자체로 이미 완벽주의는 허물어진 겁니다.
미루기를 극복하려면 시작이 중요합니다. 시작의 근본은 대충,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겁니다. ‘완벽한 시작’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벽을 낮출 수 있습니다. 쉽게 시작하면 멀리 갑니다. 더 멀리 가려면 조금씩 나누어서 천천히 여러 번 합니다. 주저함을 달래는 방법입니다. 짧은 시간 여러 번 하는 것이 긴 시간 한 번에 하려다가 주저앉는 것보다 효율적입니다. 집중력이 늘어나고 성취감도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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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지 않고 일을 하면 자신감이 커집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시작해서 마무리하는 습관을 만들고 지키면 부담스러운 큰일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미루기도 내가 내 삶 속에서 하는 선택입니다. 미루기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잠재력을 활용한다면 삶의 윤활유가 될 수 있습니다.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내게 여유로움을 제공하는 선물로 쓸 수 있습니다. 망설임과 주저함을 이해하는 성찰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미루는 선택이 자유로움을 제공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 탄력성을 얻는 쪽으로 이끈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나와 남의 관계에서 충동적인 헤어짐과 신중한 미루기 중에 어느 편을 선택하고 싶으신가요? 미루기가 충동에 대한 방어로 작용하면 성급한 이별을 방지합니다. 그러니 미루기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미루면서 생각하고 미루고 또 생각하면 능력이 점점 자라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내 판단을 미루는 것이 대인 관계 스트레스를 참아내는 능력으로 배양되는 문화라면 세상이 조금 더 평안해질 겁니다. 그러니 미루기를 덮어놓고 틀린 것 또는 옳은 것으로 여길 일은 아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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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