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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농악도 ‘여풍당당’… 韓전통문화 ‘금녀의 영역’은 없다

입력 | 2026-01-19 04:30:00

[컬처연구소] 문화유산 전승자 女 과반 시대
장 담그고 수 놓던 여성상 벗어나… 이장 맡아 산신제 축문 읽고 봉행
“고등교육 영향, 전통문화로 확장”
女 문화전수장학생은 77% 달해… 옹기-불화-단청 등 다양한 도전




지난해 3월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2리에서 열린 500년 역사의 ‘밭치리 장승제’에서 강경화 동산면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제사에 술을 올리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25년 단군 기원 4358년 세차 을사년 경진월 기해일 광덕5리 마을회의 이장 왕복례는 광덕산 산신령님 앞에 엎드려 감히 고하나이다.”

지난해 3월 강원 화천군 사내면 광덕5리에서 열린 ‘산신제’에서 제관(祭官)으로 이 축문을 읽은 건 65세 여성 왕복례 씨였다. 제관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맡아 왔지만, 왕 씨가 마을 공동체 대표인 이장이 되며 산신제를 봉행하게 됐다.

최근 전통문화 분야에서도 여풍(女風)이 거세다. 남성 위주였던 사회가 변화하면서, 보수적인 전통문화 계승에서도 여성이 주체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전승자도 여성이 절반을 넘어섰다. 하지만 성 차별적인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 농악도, 장승제도 여성이 이끌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농악’은 전통적으로 농촌 공동체 속 남성이 주도하던 공연예술이지만, 여성 전승자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국가무형유산 ‘강릉농악’ 관리 단체인 강릉농악보존회에선 2023년 사상 처음으로 여성 회장이 선출돼 단체를 이끌고 있다.

‘금녀의 영역’이던 전통 제례도 여성의 참여가 늘어 눈길을 끈다. 500년 역사의 강원 춘천시 동산면 조양2리 ‘밭치리 장승제’도 지난해 여성이 2년 연속 제관으로 참여했다(국립민속박물관 보고서 ‘한국의 마을신앙―강원 편’). 종묘제례 역시 최근 여성의 참여가 조금씩 허용되고 있다.

해외에 알려지는 전통문화도 여성이 주축인 경우가 많다. 202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오른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는 “여성을 통해 전승되면서 가족공동체를 지탱한” 측면을 높게 평가받았다.

국가유산청 통계에 따르면 이달 15일 기준 국가무형유산 전승자의 여성 비율은 56%. 무형유산을 보존하고 교육하는 전승자엔 ‘보유자’와 ‘전승 교육사’ ‘이수자’ ‘전수 장학생’이 포함된다. 아무래도 젊은층이 많은 이수자와 전수 장학생은 여성 비율이 각각 57%, 77%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는 여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제약이 과거보다 줄어든 결과로 보인다. 유산청 무형유산국 관계자는 “여성이 가사노동과 관련된 침선, 자수 등을 중심으로 계승하던 데서 벗어나 옹기, 불화, 단청 등 남성이 주를 이루던 전통 기술 종목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며 “전통예술이 고등교육과 연계를 이루면서 여성의 진출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유산 제도의 변화가 여성이 설 자리를 넓혔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7월 ‘국제유산학저널’에 발표된 논문 ‘중심인가, 주변인가? 한국의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협약 이행에서 여성의 역할’(김지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정책팀장)은 2015년 ‘무형유산법 개정’을 주요한 계기로 짚는다. 원형 그대로의 보존보다 전승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의미를 추구하는 쪽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면서, 부수적 효과로 과거 남성이 하던 영역에도 여성의 참여가 늘었다는 해석이다.

● “유산법도 사회 변화 따라 개정해야”

다만 전통문화 내부에서 성별 위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법적 전승 체계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무형유산 ‘보유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3%에 그친다. 밭치리 장승제를 조사한 박형준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여성의 참여가 늘어난 건 사실이지만, 제물 준비나 헌관(獻官·제사에서 술을 올리는 사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며 “여성이 의사 결정이나 제례 과정까지 관여하는 수준은 아직 공동체별로 격차가 상당하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전통문화 계승에서 성평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오스트리아는 국가무형유산 등재 절차에서 해당 유산이 성별에 따라 어떻게 전승되는지, 성평등 가치에 부합하는지 등을 검증한다. 콜롬비아는 국가 정책 문서에 ‘성별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고, 여성의 전승자로서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노르웨이에선 목공 등의 분야에 여성이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교육 및 전승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한국 역시 제도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지현 팀장은 논문에서 “여성을 여전히 남성의 ‘대체재’로 보는 인식이 뿌리 깊은 실정이어서, 무형유산법에 성평등 추구를 명시할 필요가 있다”며 “‘무형문화유산 보호가 성평등과 성차별 제거에 기여해야 한다’(유네스코 무형유산협약 운영지침) 같은 선언적 규정부터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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