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쓸개 파열로 장기들이 괴사돼 의사는 “사흘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장례 준비를 했다. 진통제도 소용없는 극심한 통증이 덮쳤다. 6개월 가까이 투병한 끝에 기적적으로 병원문을 열고 나왔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친구들과 달리는 트럭 뒤칸에 몰래 올라타는 장난을 치다 나뭇가지에 세게 부딪쳐 오른쪽 눈을 잃을 뻔했다. 1971년 등단한 후 시집을 출간해주는 출판사가 없어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시집을 내는 ‘자비 출판’을 했다. 시집을 산 첫 독자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반짇고리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서 시집값 700원을 꺼내 손사래 치는 아들의 손에 꼭 쥐어줬다.
‘풀꽃 시인’으로 불리는 나태주 시인(81)의 이야기다. 갖가지 고비를 넘기고 무명 시인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그의 삶을 담은 에세이 ‘너를 아끼며 살아라’(더블북)는 지난해 6월 출간된 후 6개월 만에 5만 권 넘게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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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은 “서럽고 힘겨웠던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뉴스리포트 제공
나 시인을 2일 전화로 인터뷰하고 더블북 출판사 김현종 하인숙 대표를 지난해 12월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공동 대표인 김 대표(55)와 하 대표(54)는 부부다.
나 시인은 “인터뷰, 강연 등에서 한 말과 잡지에 연재한 글을 하나하나 모아준 편집자의 정성이 고맙다. 함께 만든 책이어서 더 특별하다”고 했다.
유명 시인인 그이기에 책이 사랑받는 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200권 넘게 낸 그의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건 아니다. 또 시집에 비해 산문집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는 출간되자마자 큰 호응을 얻었고, 연말과 새해에는 판매량이 2~3배 뛰었다.
책에는 나 시인의 말과 연결되는 그의 시도 실었다. 필사 열풍을 반영해 필사할 수 있는 페이지도 넣었다. 나 시인이 인상주의 화가를 좋아하는 점을 반영해 클로드 모네의 풍경화들도 큼직하게 배치해 감상하는 즐거움을 더했다. 나 시인과 출판사가 정교하게 기획해 만든 책이 독자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나 시인은 “여러 요소를 결합해 독자가 원하는 걸 담으려 했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는 나를 잘 아는 편집자, 독자와 함께 만든 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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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너를 아끼며 살아라’ 책 표지. 더블북 제공
나 시인은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한 일이 삶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꿨다고 했다.
“가망이 없다며 생이 3일 정도 남았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 너무 살고 싶었어요. 그 때가 62세였어요. 간절한 마음이 저를 다시 일으켜 준 것 같아요. 지금은 몸이 아플 때면 ‘살아 있으니 아픈 거야. 아프니까 나는 또 살 수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눈 떠 세수하는 것,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 등 일상의 순간순간이 기적이라고 느껴져요.”
그는 결핍이 살아오는데 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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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나빠질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되뇐다. 바닥에 떨어지면 거기서부터 딛고 일어나려는 마음이기도 하다.
하 대표는 “흘러간 선생님의 말이 아까웠다. 시는 물론이고 에세이도 잘 쓰셔서 이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책 제목은 시 ‘너를 아껴라’에서 가져왔다. ‘네가 가진 것을 아껴라/해와 달이 하나이듯이/세상에 너는 너 하나/…(중략)…너의 결점과 너의 장점/너의 좌절과 너의 승리/너의 뜨거움과 그리움/너의 깨끗함을 아껴라.’
하 대표는 밥 먹을 때, 운동할 때는 물론 잠들기 전까지도 제목을 고민했다. 제목에 ‘풀꽃’, ‘인생’이 들어간 나 시인의 책이 있어 두 단어는 제외했다.
“그 즈음 지인이 ‘너는 왜 항상 일이 먼저고 너를 아끼는 시간을 뒤로 미루니. 아이들을 챙기거나 청소를 할 때도 너를 먼저 생각해’라고 말하더라고요. 울컥했어요. 제가 맏이로 태어났는데요,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거든요. 시 ‘너를 아껴라’가 눈에 들어왔어요. 다정한 위로의 말을 생각하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가 떠올랐죠. 선생님께 여쭤보니 단박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제목이 한 번에 통과된 건 처음이었어요.(웃음)”
‘너를 아끼며 살아라’에 실린 클로드 모네의 ‘라바쿠르의 센강 일몰, 겨울풍경’(1880). 책에는 모네의 풍경화들이 담겨 이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준다. 더블북 제공
더블북은 나 시인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책을 여러 권 선보였다. 한서형 아로마테라피스트와 함께 향기 시집 ‘너의 초록으로, 다시’(2022년)를 냈다. 시 ‘풀꽃’과 함께 그려진 그림을 퍼즐로 맞춰보는 퍼즐 시집 ‘풀꽃 아이’(2025년)도 있다. 나 시인의 시 40편을 접한 인공지능(AI)의 답변을 담은 ‘나태주 시 AI에게 묻습니다’(2025년)도 출간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나 시인이 냈다.
“헤겔은 ‘시각과 청각이 아니면 예술이 되지 못한다’고 했어요. 시각은 미술, 청각은 음악인데 촉각이나 후각으로 책을 낼 수 없을까 고민했죠. 그러다 향기 시집을 떠올렸어요. 여러 출판사에 제안했지만 다들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더블북의 두 대표님들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나 시인이 웹툰 작가들과 협업해 시와 이야기를 엮은 웹툰 시집(‘오래 보고 싶었다’(2023년) ‘별을 사랑하여’(2024년), ‘행복아, 어서와’(2025년))도 출간했다.
“중학교에 강연갔을 때 학생들이 ‘왜 만화책은 없어요?’라고 물었어요. 생각해 보니 삼국지도 만화책이 있는데 시는 왜 만화로 나온 게 없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만화 시집을 만들어줄게’라고 약속했습니다.”
김 대표는 실력 있는 웹툰 작가들을 찾아나섰고, 웹툰 시집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나 시인은 한 해에 책을 여러 권 내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을까.
“작가마다 스타일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시인이 독자에게 봉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시도를 하는 건 독자에게 필요한 게 뭔지 찾아서 전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나 시인은 두 대표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면 실현하려고 지독하게 애쓰는 헝그리 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나 시인에게서 많을 걸 배운다고 했다.
“선생님은 실험 정신이 엄청 강하세요. 덕분에 기존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어 재밌어요. ‘논에서 멍 때리는 카페’를 보고 ‘논멍’이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며 바로 시에 쓰시는 등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데도 적극적이시고요.”(하 대표)
“선생님은 사인하실 때 독자 이름은 물론 시도 써주시기에 시간이 꽤 걸려요. 독자 한 명이 선물용으로 10권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사인해달라고 해도 모두 해 주세요. 독자들에게 정성을 쏟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책 한 권도 절대 허투루 만들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김 대표)
나 시인은 “지금 10박스 분량의 시집에 사인하고 있다”고 했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6학년 학생들에게 졸업 선물로 나 시인의 시집을 주고 싶다며 책을 10박스 보내 사인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틀 꼬박 사인하고 있어요. 적어도 나흘은 걸릴 것 같아요. 만만찮은 작업이지만 아이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죠. 체력이 좋진 않지만 걷는 걸 좋아해서 자주 걷습니다. 평생 차 없이 살다보니 자연스레 많이 걷게 돼요. 강연을 다니며 독자들에게서 에너지도 얻고요.”
나 시인은 책을 한가득 든 채 버스, 기차를 타고 전국을 누빈다. 다른 사람이 짐을 들어준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 자꾸 더 바라고 기대게 돼요. 인생은 고달픈 거예요. 버텨야 합니다. 나이 들어도 혼자서 해야 자생력이 생겨요.”
나 시인은 올해 노래 시집을 낼 예정이다.
“제 시로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가수가 노래했어요. QR코드를 통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걸 연구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책을 계속 내고 싶습니다.”
■‘너를 아끼며 살아라’(더블북·2025년)는….
나태주 시인이 인터뷰, 강연 등에서 한 말을 모은 에세이다. 시인이 걸어온 길과 여러 고비, 이를 통해 깨달은 바를 담았다. 각각의 주제와 연결되는 그의 시도 실었다.
젊은 시절 시인은 가난한 집안 형편, 작은 키, 별로인 얼굴에 불만이 많아 운명을 원망했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 ‘살기 위해’ 시인이 되고 싶어했다. 15세 때 간절하게 꿈꿨던 소망이 오늘날까지 그가 시를 쓰며 살게 한 것이다. 시인으로 일찍 인정받지 못하고 오랜 무명 기간을 보냈기에 지금도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중학생 때 오른쪽 눈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었고 62세 때 쓸개 파열로 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기어이 회복했다. 오랜 병원 생활을 하며 잠 못 이루던 밤, 창 너머를 바라보던 그는 눈 깜빡 하는 사이 가로등이 모두 켜진 것을 보게 됐다. 그는 인생에도 기적처럼 불이 다시 켜지는 순간이 온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회복을 기원하는 많은 이들의 간절한 마음도 느꼈다. 그렇게 시 ‘멀리서 빈다’가 탄생했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는 시구로 유명하다.
행복을 느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젊었을 때 그는 불행하다고 느꼈다. 불행한 게 아니라 그렇게 느낀 것이다. 나이 든 지금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처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행복은 쉼 없이 연습하고 학습하고 깨달아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서울 시내에서 길을 잃으면 서울역을 찾아 돌아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염없이 걷다보면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는 자기 안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그게 시작이라고.
담백한 문장을 통해 힘든 순간을 견뎌내고 스스로를 다독이도록 응원한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그의 아픔과 서러움은, 삶은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나아가면 된다는 위로를 건넨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