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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칼럼]강대국 결탁의 시대가 온다

입력 | 2025-12-29 23:21:00

트럼프가 시작한 ‘2025 패권다툼’ 승자는 중국
美 NSS엔 ‘노쇠한 제국’의 피로감-이기심 가득
열강 간 ‘각축 속 타협’은 더 큰 불확실성 불러
한반도에도 春來不似春 ‘수상한 계절’ 주의보



이철희 논설위원


참으로 요란한 한 해였다. 물론 진원지는 미국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와 함께 전 세계는 불확실성의 혼돈에 내던져졌다. 트럼프는 교역의 규칙을 다시 쓰고 친구와 적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세계 질서의 보증자였던 미국이 난폭한 파괴자가 됐다. 그래서 트럼프는 과연 원하던 성과를 거뒀는가. 관세 수익으로 국고는 늘렸다지만 세계로부터 미국의 신뢰를 까먹은 것은 물론이고 연말에 받아든 국내 지지율 성적표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반면 그 최대 수혜자, 즉 결과적 승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21세기 패권을 위한 2025 라운드 대결에서 승리는 중국의 것이었다”고 진단했다. 트럼프의 145% 관세에 희토류 수출 통제로 대응한 결과였다.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드워드 루스는 ‘적이 실수하고 있을 땐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명언으로 중국의 승리를 설명했다. 시진핑은 저절로 굴러오는 전략적 선물을 조용히 챙기기만 했다는 얘기다.

외부의 압박을 버티는 데는 이골이 난 중국에 관세 폭탄이 먹히지 않을 터인 데다 함께 스크럼을 짜야 할 동맹과 우방까지 화나게 만든 상태에서 벌인 싸움에서 승리를 기대하긴 애초부터 무리였다. 어쨌든 그 결과 중국 제조업의 세계시장 지배력과 놀라운 첨단기술 추격 속도, 특히 독점적인 희토류 공급망의 무기화까지 ‘중국의 힘’을 선명하게 각인시켰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제 중국과의 빅딜에 매달리고 있다. 10월 말 부산에서의 미중 정상회담 이래 중국을 향한 타협의 손짓은 더욱 노골적이다. 특히 이달 초 한밤중에 슬그머니 백악관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선 트럼프 1기 때 ‘강대국 경쟁의 시대가 왔다’며 한판 붙어보자고 벼르던 것 같은 결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새 NSS는 마치 신생 정당의 정강정책처럼 파격적 레토릭이 가득하지만 그 어떤 일관성도 맥락도 찾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합성물 같다. 고립주의 마가(MAGA) 진영부터 전통적 패권론자, 중국 견제론자, 딜 메이커 그룹까지 다양한 이들의 손을 거쳤지만 제대로 걸러지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저마다 트럼프의 생각일 것이라며 내놓은 주장들을 얼기설기 엮은 ‘트럼프 세계관 탐구 보고서’ 수준이다.

그렇게 나온 NSS 곳곳에선 은퇴를 앞둔 노쇠한 챔피언의 심리상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적지 않다. 자국 이익 외엔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제국의 피로감 속에 확장과 전진보다는 축소와 후퇴의 기류가 역력하다. 건국 초기의 비(非)개입주의 전통을 상기시키면서도 뒷마당 중남미에 대해선 완벽한 장악을 추구하고, 유럽에는 ‘문명 소멸’을 전망하며 대놓고 극우세력에 대한 지원을 천명한다.

나아가 세계에 대한 지배가 아닌 세력균형을 추구할 것이며 “더 크고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의 특별한 영향력은 국제 관계의 변치 않는 진실이다”라고 천명한 대목은 ‘다극화 질서’나 ‘세력권 분할’ 같은 세계질서의 근본적 전환, 나아가 19세기 유럽의 강대국 협조체제 같은 ‘강대국 간 결탁’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하다.

대중국 정책과 관련해선 트럼프가 모종의 빅딜을 위해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 대신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할 수 있다던 백악관 안팎의 우려는 일단 불식시켰다. 다만 NSS 보고서는 대만해협의 일방적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던 바이든 시절의 언명에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물러섰다. 나아가 미국은 최근 고조된 중-일 갈등에 거리를 두고 있고, 며칠 전 공개된 ‘2025 중국 군사력’ 보고서에서도 적대적 톤을 누그러뜨렸다. 이 모든 게 내년 4월 중국 방문을 앞둔 트럼프에게 딜의 공간을 열어두기 위한 유화 제스처일 것이다.

트럼프 2기 출범 이래 강대국 간 대결 기류가 느슨해지면서 한때 유행하던 ‘디커플링’ ‘신봉쇄정책’ 같은 대결의 언어는 어느덧 사그라진 듯하다. 내년에도 미-러 간, 미중 간 타협의 분위기는 이어질 것이다. 그게 잠깐의 해빙일지, 결탁의 본격화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그 사이에 낀 나라들로선 자신의 운명이 스트롱맨 간 거래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더 큰 불확실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연초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도 중요한 변화의 모색이 이뤄진다.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일본 방문, 북한의 9차 노동당대회 개최가 예정돼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수상한 계절, 어느 때보다 유연한 대응 능력과 균형 감각이 절실한 때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자강력 확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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