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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조건희]2025년을 지킨 우리 곁의 히어로들

입력 | 2025-12-28 23:15:00

조건희 사회부 차장


치매에 걸린 후 아들에게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약 2400만 원을 뺏긴 오영희(가명·73) 씨가 요양원 침대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록뿐이었다. 뇌경색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그는 왼손으로 10권이 넘는 공책에 아들이 빼간 돈의 명세를 엑셀 파일처럼 꼼꼼히 채웠다. 치매라는 안개 속에서도 집요하게 남긴 그 기록은 존엄을 지키려는 마지막 노력이었다. 사라진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원망과 애정을 뒤섞어 삐뚤빼뚤하게 적었다. “이놈아 정신 차려.”

망각과 방관, 자책을 이겨낸 증언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 ‘헌트: 치매머니 사냥’ 시리즈는 172조 원에 달하는 치매 노인의 자산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 착취하는 현실을 조명했다. 서향분 씨(86)는 ‘가족 같은 이웃’에게 재산을 뺏긴 충격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도 치매에 걸렸다. 어제 일도 제대로 떠올리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그는 돈을 뺏긴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내 취재팀에게 건넸다. 오 씨와 서 씨를 포함해 36명의 치매 노인과 그 가족은 그렇게 ‘고통의 증언’을 전했다. 보도 직후 정부는 치매 공공신탁 도입 등 대책을 발표했다.

‘누락: 당신의 아파트는 안녕하신가요’ 시리즈에선 국토교통부가 ‘문제없다’며 덮었던 무량판 아파트 21개 단지 중 9곳에서 철근이 누락된 실태를 고발했다. 여기서 만난 ‘히어로’는 아파트 입주자대표 이동민(가명) 씨였다. 그는 지하 주차장 공사에서 철근을 빼먹은 시공사, 이를 방관한 정부와 1년 4개월간 홀로 싸웠다. “인천 검단 아파트처럼 무너진 건 아니잖아요”라는 구청의 방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름만 다르고 필체는 한 사람인 감리 보고서를 찾아냈다. 아파트는 재시공에 착수했다.

‘크랙: 땅은 이미 경고를 보냈다’ 시리즈는 우리 발밑의 위태로움을 파헤쳤다. 서울 강동구 명일동 싱크홀 사고로 오빠를 잃은 박수빈 씨의 비극 이전에, 두 달 전부터 지반 침하의 징후를 서울시에 알렸던 주유소 주인 이충희 씨가 있었다. 이 씨는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고 지내야 했다. 보도 이후, 늦었지만 국회에는 지반 위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고 징후 발견 시 즉각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용기 낸 이유는 하나, “같은 아픔 막아 달라”

‘헌트’와 ‘누락’, ‘크랙’ 시리즈에 힘을 보탠 건 평범한 사람의 용기였다. 마비되어 가는 손으로 써 내려간 착취의 기록, 지하 주차장 기둥을 일일이 훑던 집요함, 이웃의 위험을 알리려 시청에 전화를 건 목소리. 그들이 자신의 치부와 비극을 세상에 기꺼이 꺼내 놓은 이유는 단 하나,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이었다.

이제 2026년의 과제는 분명하다. 그 시작은 안전과 존엄에 직결된 정보를 조사하고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아파트 철근 누락이나 내 집 앞 지반의 위험이 ‘집값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는 민원 앞에 묻혀서야 되겠나. 정부는 치매 환자의 경제적 학대 피해 규모도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다. 인력 부족이라는 핑계에 잠들어선 안 될 정보다.

나아가 필수 대책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집념이 필요하다. 건강할 때 미리 재산 관리인을 정하는 ‘임의후견’을 활성화하자고 하면 누군가는 시기상조라고 할 것이다. 부실 공사를 제대로 감리하고 싱크홀 사고의 원인을 뜯어보자고 하면 누군가는 업계의 반발을 고려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 앞에서 ‘그런가 보다’라며 물러서면 위기는 반복된다.

국가가 대답할 차례다. 어렵사리 용기 낸 이들의 호소를 외면하는 순간, 정부와 국회는 다음 비극의 공범이 된다.



조건희 사회부 차장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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