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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의 무비홀릭]유머는 약자의 절규다

입력 | 2025-12-22 23:06:00

세 노인은 고기를 무전취식한다. 그들이 웃을수록 삶은 쓸쓸하다. 영화 ‘사람과 고기’. 트리플픽쳐스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러브버그.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곤충 이름이죠? 근데 ‘붉은등우단털파리’라는 진짜 이름으로 부르면 모골이 송연해져요. ‘붉은등’도 돌아버릴 것 같은데 ‘우단’에다 ‘털’에다 ‘파리’라니요. 러브버그처럼 앙증맞아서 뽀뽀해주고 싶은 이름인데, 실체는 지저분하거나 무시무시해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존재들이 있어요. ‘리틀보이’와 ‘팻맨’도 그래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수십만 사망자를 낸 끔찍한 원자폭탄들에 붙여진 귀여운 이름이죠.

자, 그럼 ‘사람과 고기’(10월 개봉)라는 한국 영화 제목은 어때요? 언뜻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2022년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본즈 앤 올(Bones and All)’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본즈 앤 올. ‘뼈까지 남김없이’라는 우리말로 옮기면 가일층 무시무시해지는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뼈까지 먹어치우는 동족포식을 통해 상대를 남김없이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의 본질을 밑바닥까지 파고드는 작품이었죠. 그러나 ‘사람과 고기’는 다행히 사람 고기를 먹는 영화는 아니에요. 섬뜩한 제목과는 반대로, 가슴 따스해지다 못해 서글퍼지는 영화죠.

이 영화는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산다→그런데 노인도 사람이다→따라서 노인도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삼단논법으로 딱 정리돼요. 초고령화와 함께 독거빈곤노인들이 늘어가는 쓰린 현실을 놀랍도록 넉넉한 농담 조로 다루어서 더욱 가슴 저미죠. 화려한 과거를 뒤로한 채 지금은 폐지를 줍거나 길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세 노인 형준(박근형), 우식(장용), 화진(예수정)이 의기투합해 고기 ‘무전취식단’을 결성한단 내용이에요.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튀’하는 이들의 ‘5단계’ 실천지침은 치밀하고 창의적이에요. ①불판 위 고기를 다 먹어갈 무렵 형준이 ‘세상 물정을 노인이라 잘 모른다’는 꼰대 같은 표정으로 “여기 재떨이 하나 가져다주쇼” 하고 종업원에게 큰 소리로 요청한다. ②종업원으로부터 “음식점에선 금연인데요?”라는 당연한 답을 이끌어낸다. ③종업원의 대답을 듣자마자 형준이 “아이고! 그럼 나가서 피워야겠네?” 하면서 음식점 밖으로 담배를 들고 자연스레 나간다. ④그다음 화진이 카운터로 가서 “화장실에 가려 한다”면서 화장실 열쇠를 달라거나 비번을 알려달라고 함으로써 변의의 진정성(?)을 어필한 뒤 화장실로 향하는 척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⑤마지막으로 우식 차례. 바로 쫓아 나가고 싶은 조급함을 억누른 채 “여기 목살 1인분 추가요”라고 외친다. 추가된 고기를 불판에서 혼자 구우면서 ‘고기가 타버리기 전에 얼른 일행을 불러와야겠다’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일행을 찾는 척하며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때, 못 쓰는 휴대폰 하나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고 나옴으로써 혹시 모를 고깃집 주인의 의심을 미연에 차단한다. 어때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오션스 일레븐’이나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같은 케이퍼 무비들 뺨치죠? 이들 노인 사기단에게도 나름의 행동지침은 있어요. ‘장사가 잘되는 집만 선택함으로써 어려운 자영업자에겐 피해를 주지 않는다’나 ‘한우처럼 비싼 고기는 먹지 않음으로써 먹튀 단가를 줄이고 먹튀의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같은 것들이지요.

결국 이들은 꼬리가 잡혀요. 이 영화가 의도하는 건 노인들의 사기 행각에 담긴 디테일이 아니에요. 먹튀를 앞두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살아 있음을 자각하게 된 이 노인들, 그들을 우리 사회는 죽기만을 기다리는 고깃덩이 취급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죠. 삼겹살을 바라보는 식욕과 두려움과 회한과 행복이 뒤섞인 노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야말로 이 영화의 근본적인 운동성이니까요.

[2] 그래요. 좋은 영화는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인 관객은 스스로 질문을 창출해요. 그래서 위대한 영화는 감독에 의해 시작되고 관객의 질문으로 완성되죠. 최근 개봉한 ‘아바타: 불과 재’를 보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문득 떠올렸어요. 왜 아바타 시리즈에는 한순간도 유머가 안 나올까…. 어쩌면 유머란,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올라타는 안드로메다행 급행열차는 아닐까요. ‘사람과 고기’ 속 노인들이 익살 섞인 먹튀를 통해 현실의 사막에서 존재증명을 하려 했듯 말이에요.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말했어요. 유머의 원천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라고요. 그래서 천국에는 유머가 없다고요. 아바타에 등장하는 판도라 행성은 천국보다 낯선 천국이기에, 농담이 실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말이에요. 유머란 강자가 구사하는 유희의 도구가 아니라, 약자의 단말마 같은 절규입니다.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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