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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초보 유엔대사가 뛰어야 할 시간이 온다

입력 | 2025-12-15 23:15:00

박용 부국장


2018년 6월 1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산파 역할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맡았다. 김 부위원장은 뉴욕으로 날아와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보이는 38번가 코린티안 콘도 37층 주유엔 미국 차석대사 관저에서 북한 비핵화와 체제 보장 및 경제 지원을 두고 폼페이오 장관과 이틀간 2차례에 걸쳐 240분간 담판을 벌였다. 이후 워싱턴으로 가 김 위원장 친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정상회담 물꼬를 텄다. 북-미가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한다면 7년 전처럼 뉴욕이 다시 바빠질 것이다.

유엔서도 대화 페이스메이커 필요

북한이 뉴욕을 대미 협상 창구로 쓰는 건 미국과 미수교국이라는 현실적 제약 때문이다. 미국 내 북한 국적자는 유엔 외교관 신분으로 온 주유엔 대표부 근무자와 가족뿐이다. 유엔 블루북에 따르면 주유엔 북한 대표부에 김성 대사를 포함해 12명이 일하고 있다. 이들조차 대표부 반경 25마일(약 40km)을 벗어날 수 없다. 북한이 미 당국과 접촉할 공간은 제3국을 빼면 사실상 뉴욕밖에 없다. 뉴욕에는 협상 과정에서 평양과 소통할 통신보안 장비를 갖춘 북한 공관도 있다.

뉴욕 채널이 본격 가동된다면 북-미 소통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를 자임한 한국의 유엔대사 역할도 중요해진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중요한 자리에 사법시험(28회)과 사법연수원(18기) 동기인 차지훈 대사를 임명했다. 차 대사는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니다. 국제법 전문가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이렇다 할 다자외교 경험은 안 보인다. 10월 국정감사에서 2017년 북한의 제6차 핵실험 이후 만장일치로 채택된 고강도 대북 제재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제2375호 내용조차 알지 못하는 업무 미숙도 드러냈다.

그런 초보 유엔대사가 뉴욕서 마주할 북측 상대는 7년 차 베테랑 김성 대사다. 북한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끝나자 군 출신의 자성남 대사를 유엔 경험이 있는 외교관인 김 대사로 교체했다. 미 정부는 당시 김 대사의 비자를 넉 달간 끌어오다 9월 유엔 총회 직전에 발급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자 대사는 북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로 긴장이 고조된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연설을 보이콧했지만, 김 대사는 2018년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끝까지 들었다. 달라진 북-미 관계의 상징적 순간이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뒤 김 대사의 표정은 달라졌다. 그해 5월 21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14분간 기자회견을 열고 유엔 대북제재 위반 혐의로 미국에 압류된 북한 화물선 ‘와이즈 어니스트호’의 반환을 요구했다. 당시 뉴욕특파원이던 필자는 기자회견장에서 성명서를 읽던 그의 손이 바르르 떨리는 걸 맨 앞자리에서 지켜봤다. ‘포커 페이스’ 김 대사도 국제사회 시선이 쏠리는 유엔 무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유엔서도 대화 페이스메이커 필요

초보 유엔대사에게 주어진 업무 적응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내년부터)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차 대사의 전문성이 훨씬 더 올라와야 한다. 대표부에 북-미 협상 베테랑도 더 전진 배치해야 한다. 2019년 유엔대사를 퇴임한 조태열 전 외교부 장관은 북과 대화 국면의 유엔 외교를 대북제재라는 브레이크와 남북 교류협력의 페달을 번갈아 밟아가며 균형을 잡고 나아가는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 유엔 외교 소식통은 “당시 유엔대사 업무의 절반이 미국 대사와의 소통이었다”고 말했다. 유엔대사가 원활한 소통과 균형 잡힌 자전거 외교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북-미 사이에서 소외된 트러블메이커가 될 수 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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