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첫 번째 이유는 역할의 변화였다. 회사에서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회의와 보고, 미팅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팀을 이끌었다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교육을 담당했다가 낯선 업무를 맡기도 했다. 가만히 있어도 새로운 임무가 연달아 주어졌다. 새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집중해야 할 대상이 계속 바뀐다는 뜻이었다. 계획도 그에 맞춰 다시 짜야 했다.
회사를 떠나자 상황은 눈에 띄게 변했다. 하는 일이 없어 일상이 단순해졌고, 연락하는 이가 드물어 챙겨야 할 대상이 적어졌다. 일과라고 해봐야 글을 쓰거나 영상을 만들고 가끔 외출하는 스케줄이 전부였다. 생활이 단조로워진 만큼 활동 범위도 좁아졌다. 어쩌면 계획을 굳이 다르게 세울 필요가 없는 형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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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그 기준은 바뀌었다. 예전에는 많이 갖는 것을 원했다면, 이제는 가진 것을 잃지 않는 데에 관심을 두게 됐다. 앞만 보며 달리던 나날은 지나가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게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다. 의외로 매일의 무탈함이 주는 평온함도 매력적이었다. 뜻한 바를 달성하려고 애쓰는 노력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세 번째 이유는 방향의 상실이었다. 직장에 다녔을 때는 길이 명확했다. 회사가 제시하는 목표가 내 최종 목적지였으니 조직이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다. 내가 직접 선택하지 않아도 헤매지 않았다. 문제는 속도였다. 부여받은 여러 사안을 얼마나 빠짐없이, 얼마나 신속하게 처리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퇴직과 동시에 길은 사라졌다. 내 장래에 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규 분야 개척’, ‘소득 파이프라인 구축’처럼 원대한 목표를 세워보기도 했다. 솔직히 내 현실에는 맞지 않았다. 누군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요동쳤다. 그렇다고 그 방면으로 나설 용기가 생기지도 않았다. 결국 거창한 계획은 접고 해마다 같은 다짐만 되풀이하다 또 다른 해를 맞곤 했다.
곱씹을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퇴직한 뒤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제자리에 머무는 느낌이었다. 다이어리 안의 계획들은 굳은 각오가 아닌, 성의 없이 끄적거린 메모처럼 보였다. 새해가 밝아오니 당연히 해야 하는 숙제인 양 받아들여졌다. 그 안에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썩 내키지 않아도 놓지 못하는 모습, 그 점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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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결론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해를 무언가를 바꾸는 시기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다가올 일 년을 새로이 설계하려 들기보다, 지난 한 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살피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잘한 행동보다 잘 버텨낸 날들을, 달려온 거리보다 멈추지 않았던 지점을 되짚어 볼 참이다. 해가 바뀐다고 인생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이 나만의 방향과 속도로 흘러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내년 계획도 더하지 않고 기존 내용을 다듬는 쪽으로 수정했다. 과한 목표는 지우고, 꾸준히 해야 할 것들로 고쳐 넣었다. 아침에 물 한 컵 마시기, 하루 30분 책 읽기 등 작은 실천들이 나를 계속해서 굳건히 지켜주리라 믿는다. 퇴직자의 새해 계획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다. 어제보다 조금 나은 나로 살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