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노스 사기, 엘리자베스 홈스
이준만 서울대 경영대 교수
홈스는 어느새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영광은 과학적 사실이 아닌 환상으로 쌓아올린 신기루였다. 혁신이라는 화려한 언어 뒤에 숨은 부실한 기술과 거짓말은 결국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신화’가 되려 한 천재 소녀
홈스는 1984년 미 워싱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야심 있는 아이로 평가받던 그는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교수들의 눈에 띄었다. 평소 피를 뽑는 것을 무서워했던 홈스는 ‘채혈의 고통 없이 검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문제의식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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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국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학교를 중퇴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겠다며 창업에 뛰어든 것이다. 이 결정은 많은 이들에게 ‘천재의 대담한 도전’으로 비쳤고, 홈스의 서사는 이 지점부터 본격적인 혁신 신화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홈스는 스티브 잡스를 연상시키는 검은 터틀넥을 입고, 낮은 목소리로 비전을 설파하며 카리스마를 구축했다. 투자자와 언론은 그를 ‘여성 잡스’, ‘의료 혁신의 아이콘’으로 치켜세웠고, 홈스는 어느새 새로운 기술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품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테라노스 “피 한 방울로 혁명”
홈스가 세운 테라노스의 비전은 단순 명료했다. 단 한 방울의 피로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술이 현실화되면 병원과 실험실의 기존 패러다임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컸다. 미국의 검진 시스템은 비용이 지나치게 높고 절차가 복잡하다. 또 검사 결과를 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만약 홈스의 기술이 가능하다면 이런 구조를 단번에 바꾸는, ‘의료 혁명’ 그 자체였다.
홈스는 “의료는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혁신의 마지막 미개척지”라며 의료검사 산업 자체를 재정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같은 전직 국무장관부터 루퍼트 머독과 래리 엘리슨에 이르기까지 실리콘밸리와 월가의 거물들이 잇따라 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때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는 90억 달러(약 13조2000억 원)까지 치솟았다.
기술은 없었고, 집단적 맹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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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홈스는 스토리의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문성보다 비전이, 객관적 데이터보다 서사가 우선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교묘히 활용했다. “피 한 방울로 수백 개의 질병을 진단한다”는 메시지는 단순했고 강렬했다. 많은 이들은 기술적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혹시 이번에는 진짜가 아닐까?’라는 희망을 선택했다.
셋째, 투자자들은 그가 가진 ‘사회적 증거(social proof)’를 본능처럼 신뢰했다. 키신저, 슐츠, 머독 같은 거물급 인사들이 이미 테라노스와 연관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은 ‘믿어도 되는 회사’라고 판단했다. 이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주 나타나는 집단적 확증 편향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더 나아가 내부 직원들이 기술적 문제를 제기하자, 홈스와 서니 발와니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이를 ‘회사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하며 철저한 감시와 압박으로 입막음을 시도했다. 기술팀 회의에는 변호사가 상시 배석했고, 비판적 의견을 낸 직원은 조직 내에서 즉시 고립됐다. 테라노스의 신화는 기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한 통제와 집단적 환상이 빚어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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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저널(WSJ) 존 캐리루 기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는 테라노스 내부에서 기술적 문제를 직접 경험한 직원들의 문제 제기였다. 이들은 실험 데이터가 반복적으로 맞지 않고,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까이에서 보며 ‘기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근본적 의심에 다다랐다. 특히 몇몇 젊은 연구원들은 “환자에게 실제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윤리적 문제를 우려하며 조심스레 문제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용기 있는 제보는 캐리루에게 전달됐고, 그는 수개월 동안 전현직 직원들을 비밀리에 인터뷰하며 테라노스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캐리루의 보도는 테라노스의 신화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기술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기업임이 드러났고, 홈스는 2022년 사기 및 공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징역 135개월(11년 3개월)의 중형과 함께 5억 달러 이상의 손실 배상 의무를 지게 됐다. 한때 ‘세상을 바꾼 여성 CEO’로 찬양받던 인물은 이제 ‘세상을 속인 창업자’의 대명사로 남게 됐다.
‘한국형 홈스 신드롬’을 경계하라
한국에서도 ‘기술 검증’보다 ‘비전 스토리’를, ‘지속 가능성’보다 ‘성장 속도’를 우선시하는 풍토가 목격된다. 기술이나 역량 없이 화려한 비전만을 앞세워 잠시 주가를 띄운 뒤, 경영 실패라는 핑계 뒤로 숨으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영자들도 적지 않다. 정보가 부족한 개인투자자들을 속여 자신들만 이익을 챙기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지만, 제도적 징계는 미비하고 책임 구조는 허술하다.
특히 성과 검증이 어렵고 정보 비대칭성이 큰 바이오와 기술 산업에서는 일부 경영자들이 투자자의 신뢰를 ‘비전 마케팅’의 도구로 삼는 경우도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른바 ‘한국판 엘리자베스 홈스’들이 형사 처벌을 받더라도 비교적 짧은 형기를 마치고 다시 사업가로 복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경영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진짜 혁신을 만드는 건 연구실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기술을 다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외면받는 시장은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것은 화려한 서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래 기술을 만들어 가는 이들의 정직한 노력이다.
이준만 서울대 경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