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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정은]당신도 받게 될지 모를 ‘위법한 지시’

입력 | 2025-12-01 23:15:00


‘불법적 명령은 거부해야 한다(You must refuse illegal orders).’ 당연한 말처럼 들리는 이 한 문장 때문에 요즘 미국 정치권은 시끄럽다. 마크 켈리 상원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6명이 이 메시지를 담아 내놓은 1분 30초짜리 동영상이 발단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형시켜 마땅한 반역자들”이라며 격노하고, 미 국방부와 연방수사국(FBI)이 의원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정쟁으로 비화했다.

美에서도 불거진 ‘불법 명령’ 복종 논란

동영상에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위법한 명령’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치안을 이유로 야당 강세 지역에 주방위군을 투입하고, 베네수엘라 마약 카르텔을 척결한다며 카리브해로 해군을 투입한 것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군대를 정치적 압박 및 타국 정치에 개입하는 수단으로 쓰는 게 위법하니 군이 이를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야당 의원들의 메시지는 1년 전 계엄의 밤을 지나던 한국에 더없이 공명했을 메시지다. 당시 군인들은 거리를 배회하거나 편의점에 머물며 사실상 작전 이행을 거부했다. 자칫 항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계엄 상황에서 상식적 판단이 작동한 사실상의 불복종이었다.

다만 국회 문을 부수고 정치인을 잡아들이라는 것처럼, 누구라도 잘못됐다고 느낄 명백한 불법, 혹은 위법성이 늘 곧바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법의 경계선을 오가며 해석 논란을 빚는 회색지대의 지시들은 판단이 쉽지 않다.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당장 이를 증명할 근거도 법적 지식도 부족한데 시간까지 다투는 상황이라면 현장 실무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워싱턴 내 갑론을박 속에서도 미군은 서슬 시퍼런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다. FBI와 펜타곤이 야당 정치인 박해로 볼 수 있는 민주당 의원 조사를 진행 중인 것도 이런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는 방증일 것이다.

‘위법한 지시’의 문제는 군뿐만 아니라 공직사회, 더 나아가 민간 영역까지 상하 위계가 있는 어느 조직에서나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문제다. 불법으로 보이는 경우조차 이를 뒷받침하는 상황적 논리, 정책적 배경,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 경우가 부지기수다. 공무원들만 해도 성과로 평가받던 주요 정책이 정권이 바뀌면서 순식간에 처벌 대상이 되는 사례들을 수차례 목격했다. 4대강 사업, 문화계 블랙리스트, 탈북자 강제 북송, 탈원전 정책 등 주요 국가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각 부처 공무원들이 줄줄이 수사받거나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정부가 국가공무원법에서 ‘복종의 의무’를 삭제키로 한 것은 그 취지가 옳을지라도 결과적으로 실무자들에게 판단 책임을 맡겨버리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남는다. 앞으로는 “윗선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하소연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공무원들의 계엄 가담 여부를 조사하는 ‘헌법존중 정부혁신 TF’ 활동이 공직사회에 미칠 후폭풍도 간단치 않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벌써부터 ‘모든 지시를 메모하고 문서로 남기고 녹음하라’고 서로를 상기시키며 납작 엎드려 있다고 한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이어지는 분위기가 퍼지게 되면 어떤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겠나.

윗선 책임 회피로 억울한 징계 없어야

실무자가 과도한 징계를 받지 않도록 하려면 결정권자가 불법 지시를 내리는 일부터 없어야 한다. 이런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할 수 없다면 최소한 문제가 드러났을 때 제대로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 비상계엄 1년이 지나도록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전직 대통령의 재판 장면은 그래서 더 민망하다.



이정은 부국장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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