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을 살리는 로드 히어로] 동아일보-채널A 2025 교통안전 캠페인 〈16〉 고령 보행자 보호하는 싱가포르 2014년부터 지정된 ‘실버존’… 주택가 도로 재설계해 감속 유도 “안전한 거리가 고립도 막아”… ‘프렌들리 스트리트’로 생활권 확장
10월 27일(현지 시간) 싱가포르 부킷메라뷰에 설치된 실버존에서 고령자들이 길을 건너고 있다.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해 차량은 서행할 수밖에 없었고, 고령 보행자는 건널목 중간 교통섬에서 쉴 수 있었다. 싱가포르 교통당국은 실버존 내 사고 감소율이 전체적으로 약 80%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싱가포르=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
이곳은 2014년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실버존으로 지정된 도로다. 그 전엔 요양시설 등이 밀집한 주택가라 고령 보행자가 많은데도 호커센터(푸드코트)를 이용하거나 물류를 나르는 차량의 진입이 빈번해 사고 위험이 높았다. 그러나 실버존이 설치된 후엔 신호등이 없는데도 보행자에 맞춰 건널목 앞에서 차량이 먼저 멈추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올 10월 기준 싱가포르에는 이 같은 실버존 44곳이 운영 중이다. 2019년 기준 완성된 15개 실버존에서 고령 보행자 교통사고가 연평균 14건에서 4건으로 감소했다. 싱가포르 교통당국은 실버존 내 사고 감소율이 약 80%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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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정부는 고령 보행자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2014년 실버존을 도입했다. 고령 인구 비율이 높거나 노인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지역이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식당가나 의료시설 등 고령자가 자주 이용하는 편의시설 주변이 포함된다. 2008년부터 실버존이 본격 조성된 한국에 비해 도입은 늦었지만 더욱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단속을 강화하는 대신 도로 구조 자체를 바꾸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탄티니 싱가포르 육상교통청(LTA) 교통설계·관리국장은 “실버존은 도로의 시각적·물리적 특성을 바꿔 운전자들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해 단속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율적으로 안전하게 운전하는 환경을 만든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실버존 내 제한 속도를 시속 40km에서 30km로 낮추는 작업도 단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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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존이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지속적인 주민과의 소통과 지역 맞춤형 설계가 꼽힌다. 탄 국장은 “현장 조사와 교통·보행 흐름 분석, 주민 의견을 바탕으로 지역 맞춤형 설계를 한다”며 “주민 참여가 실버존의 핵심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보행자 전체에 친화적인 거리 조성”
싱가포르는 실버존에 머물지 않고 보행자 보호 정책을 전체 생활권으로 확장하고 있다. 2023년 도입된 ‘프렌들리 스트리트(Friendly Street)’가 대표적이다. 실버존이 고령자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한다면 프렌들리 스트리트는 쇼핑센터, 학교, 지하철역 주변 등 시민 전체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지역이 대상이다.
시범지역인 싱가포르 웨스트코스트 로드의 경우 약 850m 구간이 프렌들리 스트리트로 지정됐다. 10월 28일 이곳을 찾아보니 운전자가 보행자를 배려할 수 있도록 건널목 앞 노면을 초록색으로 칠하고 제한속도를 알리는 숫자 ‘40’을 커다랗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건널목 초록불도 약 30초 간격으로 켜져 보행자가 길을 건너기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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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런 변화가 도시의 안전뿐 아니라 고령층의 사회적 활동성에도 영향을 준다고 분석한다. 실버존 주민 인식을 조사한 새뮤얼 청 싱가포르기술디자인대(SUTD) 교수는 “보행 환경이 불안하면 고령자의 이동 범위가 줄고 이는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실버존은 노년층의 활발한 사회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청 교수는 궁극적으로 보행자 친화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단속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보행자를 보호하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며 “우리는 모두 보행자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내 실버존, 전통시장으로 확대해야”
노인 보호 구역, 전국 4000여 곳 운영
경로당 위주로 지정돼 실효성 지적
“법 개정과 함께 운전자 인식 개선 필요”
경로당 위주로 지정돼 실효성 지적
“법 개정과 함께 운전자 인식 개선 필요”
식당가 등 고령 보행자가 자주 이용하는 생활편의시설 주변을 실버존(노인 보호 구역)으로 지정한 싱가포르처럼, 한국도 고령자의 실제 생활 동선을 반영해 전통시장 주변 등으로 실버존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노인복지시설, 생활체육시설, 자연·도시공원 주변 등을 실버존으로 지정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실버존에서는 차량이 시속 30km 이하로 운행해야 하고 주정차도 금지된다. 이를 위반할 경우 과태료가 최대 2배로 가중 부과된다. 지난해 기준 전국에는 4042곳의 실버존이 있다. 2020년(2287곳)의 약 2배로 늘었다.
하지만 실버존이 주로 경로당 같은 노인복지시설 인근에 집중된 탓에 고령 보행자의 생활 동선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한국교통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층이 물품 구입을 위해 이동하는 비중은 약 10%로, 경로당 등 여가활동 목적 이동(12%)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때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비율이 56%로 가장 높아 보행 안전을 위한 보호가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조례를 통해 전통시장을 실버존으로 지정해 왔다. 하지만 고령 보행자 교통사고가 2020년 9739건에서 지난해 1만1301건으로 지속해서 증가하면서 법적으로 지정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제로 최근 경기 부천시의 한 전통시장에서 발생한 트럭 돌진 사고의 사상자도 대부분 중장년층이었다. 국회에는 올 9월 실버존 지정 대상에 전통시장을 추가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유상용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고령 보행자 사고 다발 지역 주변에 전통시장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관련 조례를 지정한 지자체는 10%도 되지 않는다”며 “법 개정과 함께 운전자들이 고령 보행자를 인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캠페인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공동 기획: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소방청 서울시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도로공사 한국도로교통공단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교통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독자 여러분의 제보와 의견을 e메일(lifedriving@donga.com)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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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