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 때리기는 당국의 ‘무능’ 자인 해외투자 증가, 부작용만 있는 것 아냐 日은 ‘수출대국’서 ‘투자대국’ 변신 성공 ‘물가 안정’ ‘혁신 토양 조성’이 진짜 대책
천광암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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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분들이 하도 해외 투자를 많이 해서 ‘왜 이렇게 많이 하냐’고 물어봤더니… 답이 ‘쿨하잖아요’ 이렇게 딱 나오더라고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환율이 1500원 가까이 고공행진을 하는 원인은 “한미 금리 차도, 외국인투자가도 아닌 해외 주식 투자”라면서 덧붙인 말이다.
이 총재의 이날 ‘쿨 투자’ 발언은 지난달 26일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환율 브리핑에서 한 ‘세금 발언’으로 불이 붙은 서학개미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됐다. 서학개미들은, 이 총재가 과거 자녀들의 해외 유학비로 20억 원을 썼고 장용성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41억 원이 넘는 미국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지난 뉴스’까지 소환하며 이 총재의 발언을 성토했다.
구 부총리는 브리핑에서 서학개미에 대한 과세 강화 여부를 묻는 질문에 “현재로선 검토하고 있지 않지만, 상황이 된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재 국내 주식의 경우는 양도소득세가 전혀 없지만, 해외 주식은 연간 양도차익 250만 원을 초과하는 수익에 대해서는 22%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일종의 ‘징벌세’인 셈인데, 이를 더 강화할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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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서학개미들을 외환시장 교란 ‘주범’처럼 몰고 가고, ‘징벌세 강화’까지 거론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NH투자증권이 지난해 7월 해외주식 투자자 63만9685명의 계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인당 평균 투자 원금은 793만 원이었다. 한국의 외환시장은 하루에만 100조 원이 넘게 거래되는 거대한 시장이다. 800만 원도 안 되는 원금을 투자한 서학개미들에게 외환시장 불안의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정부와 외환 당국의 무능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책임 전가를 위한 희생양이 ‘굳이’ 필요하다면, 장 금통위원처럼 수억, 수십억 원을 투자한 ‘서학고래들’이어야지 “젊은 분들”이 돼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해외 투자 증가가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만 끼치는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고도성장을 경험한 일본을 보자. 지난해 일본이 상품을 수출해 남긴 무역수지는 4조480억 엔(약 38조 원) 적자였지만, 전체적인 경상수지는 30조3771억 엔(약 286조 원)의 기록적 흑자였다. 기업이 해외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을 포함해 배당과 이자로만 41조7114억 엔(약 393조 원) 흑자를 낸 덕분이었다. 해외 투자가 늘어나는 것은 ‘수출대국’을 넘어 ‘투자대국’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물론 지나친 해외 투자가 국내 자본시장 위축과 환율 불안을 부르는 것은 맞다. 이 총재의 지적처럼 해외 주식에 2배, 3배 ‘레버리지 투자’를 하다가는 ‘쪽박’을 차기 십상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필요하다. 또한 환율 불안이 국가 경제를 골병들게 하는 ‘나쁜 원저’로 진행할 가능성도 서둘러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수록 애먼 서학개미 때리기 같은 ‘쇼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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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수지 등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 요인에 대한 개선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K팝, K드라마, K의료, K푸드 등 K컬처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원저’로 인해 외국인들의 구매력이 커지는 현 상황은 관광산업을 ‘달러박스’로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서학개미들이 미국 빅테크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 기업이 혁신과 성장, 호(好)실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국내 주식시장을 키우려면 한국에서도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기업이 싹을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밸류 업”을 수백만 번 외친들, 법인세 인상과 노동 규제 강화 같은 반기업 정책을 쏟아내는 한 서학개미의 ‘국장 탈출’ 행렬은 꼬리에 다시 꼬리를 물 뿐이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