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멈춰버린 인쇄기의 시간, 청년 손끝에서 다시 흐른다 [그 마을엔 청년이 산다]

입력 | 2025-11-30 09:00:00

지방 소멸에 맞서는 청년들의 이야기-27회
광주광역시 청년마을 ‘서남예술촌’ 김소진 대표




사진제공=1995Hz


광주광역시에는 지역민끼리만 통하는 비공식 지명이 있다. 동구 서남동 원도심의 ‘구시청사거리’. 옛 전남도청을 오른쪽에 끼고 있는 이곳은 과거 ‘금남로∙충장로’와 함께 광주 역사∙문화의 메카였다. 한때 젊은이들의 발길로 황금기를 누렸지만, 이제 한 집 건너 한 집이 비어있을 정도로 활력을 잃었다. 서남동은 광주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인구감소관심지역’으로 꼽힌다.

청년들이 서남예술장 현수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1995Hz


이곳을 다시 살리려고 팔을 걷어붙인 청년들이 있다. 김소진 대표(30)가 이끄는 ‘1995헤르츠’다. 광주비엔날레의 태동(1995년)과 함께 태어난 청년(90년대생)들이 함께 하는 주파수(Hz)라는 뜻이다. 이들은 현재 구시청사거리 일대를 ‘서남예술촌’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쓰고 있다.

지난 4월 행정안전부는 서남예술촌을 광주 최초의 ‘청년마을’로 선정했다. 청년마을은 행정안전부가 청년 유입과 지역활성화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청년들이 모여 창업-문화-사회관계망을 형성하는 프로젝트다. 올해 공모를 통해 전국 12곳이 청년마을로 선정됐다.


대학시절 드나들던 그 골목…텅 빈 모습에 눈물

서남예술촌을 이끌고 있는 김소진 대표. 사진제공=1995Hz


김소진 대표는 전업 예술인이다. 예술-문화의 고장 광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 조선대학교에서 시각 문화를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술 전시 기획자이자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김 대표는 대학시절부터 동기들과 구시청사거리 일대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곳에 ‘인쇄 골목’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창작의 완결을 지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영역이 인쇄에 포함돼 있어요. 한마디로 여긴 문화예술의 중심지 같은 곳이었어요.”

서남 예술촌으로 변모하고 있는 광주 동구 인쇄거리. 광주=박태근 기자 ptk@donga.com


1940년대부터 서남동에는 소규모 인쇄소가 하나둘 들어서며 전성기에는 300곳이 넘는 인쇄 업체가 밀집했다. 그러나 디지털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그 명맥이 끊기기 시작했다. 대를 이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인쇄소 간판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주문 가능한 세상이 됐고, 고급 기술이나 소재 측면에서 서울에 직접 발주를 맡기는 게 나은 경우가 있고, 예술가들이 굳이 이곳을 찾아올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의지”
김 대표는 2021년 뜻이 통하는 대학·대학원 친구들과 함께 시각예술 공동체인 ‘1995Hz’를 결성했다. 전업 예술인이 살아갈 기반을 조성하고, 예비 예술인을 양성하는 팀이다. 2022년에는 40년 역사의 광주 향토 호텔 ‘금수장’이 영업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 객실을 ‘호텔아트페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린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며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짐도 늘고, 나이도 서른을 넘기면서 이제 우리도 좀 한곳에 뿌리를 내려 정착 해보자 하는 소망이 생겼어요.”

그 무렵 마음속에 있던 인쇄거리의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넘쳐나는 유휴공간을 예술 창작의 공간으로 꾸며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게 하자는 구상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쇄업체들과 시너지를 만들고, 거리가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건 동구청 도시재생센터 주명옥 팀장의 조언 덕분이었다. 김 대표의 활동을 오래 지켜봐 온 그는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사업을 서남동 인쇄거리에서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게 ‘서남예술촌’의 출발점이 됐다. 모든 상황이 김 대표의 생각과 맞아떨어졌다.

“이런 사업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관의 협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거든요.”

사진제공=1995Hz


광주에서 미대를 졸업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미술을 하려면 서울 미술을 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모든 인프라가 서울에 몰려 있으니 예술가로 살려면 서울로 빨리 가라는 말이다.

“왜 우린 뭔가를 하려면 꼭서울로 가야 할까? 광주에서는 못하는 걸까? 타지역 예술가들을 오게 해 서로의 재능과 영감을 주고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해왔어요. ‘문제는 돈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시 모여드는 예술가와 인쇄 장인들

사진제공=1995Hz


지난 6월 30일 서남예술촌은 반상회 ‘인사이트 오브 서남동’을 열고 첫 삽을 떴다. 지역의 청년 예술인들을 초대해 함께 인쇄거리 골목을 거닐며 아이디어를 공유했다. 인쇄 장인들과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도 나눴다.

이곳에서 40년째 대를 이어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김명수 사장은 청년들과 협업하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청년들이 지역을 살리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와서 물어보고 하는 싹싹한 모습에 활력이 돌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직 시작하는 단계라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올해는 정말 힘들었어요. 선후배 예술인, 문화계 종사하시는 분들도 불러 모아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고, 무엇보다 건물주들 설득해서 공간을 마련하는데 노력했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해 주셨어요.”

사진제공=1995Hz


지난 15~16일에는 이 거리에서 청년마을 사업의 첫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서남예술장’을 열었다. 미술장터, 팝업스토어, 음악공연, 다채로운 예술 참여부스를 마련했다. 

내년에는 타지역에서 온 청년들이 일대에 머물며 서남예술촌을 둘러보고 축제에도 참여할 수 있는 관광코스도 개발할 예정이다. 함께 붙어있는 아시아음식문화 거리와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접목해 수익 창출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상품도 고민하고 있다. 서남동 주민들과 청년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랑방을 운영하고, 본격적인 수익창출 연계에 들어갈 계획이다.

사진제공=1995Hz

사진제공=1995Hz

광주=박태근 기자 ptk@donga.com

트랜드뉴스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