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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 내몰린 군인들에 조소로 답한 군통수권자[손효주 기자의 국방이야기]

입력 | 2025-11-17 23:11:00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지귀연)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에 출석한 윤석열 전 대통령(가운데). 이날 방첩사 장교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법원 중계 화면 캡처


손효주 정치부 기자

 “재판장님. 한 말씀만 드려도….”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판사 지귀연)에서 열린 윤석열 전 대통령(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공판 현장. 증인으로 나온 유재원 국군방첩사령부 사이버보안실장(대령)이 마지막 발언을 요청했다.

“12·3 비상계엄의 주범으로 꼽히는 방첩사지만, 방첩사 내부에도 불법 계엄에 저항한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에 좀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눈길을 끈 건 이 발언 직후 윤 전 대통령의 반응이었다. 윤 전 대통령 얼굴엔 조소로 보이는 웃음이 번졌다.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이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을 통해 방첩사 부대원들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산실 등을 확보하라고 지시한 건 계엄 상황에선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은 선관위 전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라고 한 것인데 방첩사 부대원들이 서버를 떼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사실상 부대원들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다른 증인 양승철 방첩사 전 경호경비부대장(중령)에게는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인 명령은 내려온 적 없지 않으냐”고 물었다. 부대원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법리 검토를 한 뒤 자체 판단하에 선관위 확보 등을 위해 출동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상식대로라면 윤 전 대통령은 유 대령을 비웃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방첩사 부대원들의 ‘자유 의지’를 추켜세우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 했다. 자신이 감행한 기습 계엄 선포 여파로 방첩사 부대원들이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를 모를 리 없어서다.

최근 방첩사는 외부 장교 등이 포함된 평가위원회를 꾸려 ‘근무 적합성 평가’를 실시했다. 계엄 당시 출동한 인원 등 약 400명이 대상이었다. 평가 항목엔 예년엔 없던 ‘준법정신’이 포함됐다. 이달 10일 ‘선별위원회’에 회부될 대상자가 정해져 개별 통보됐는데, 유 대령과 양 중령은 물론 당시 출동한 부대원 대부분이 포함됐다. 이들은 ‘준법정신’ 항목에서 최저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첩사에서 30년을 근무한 심모 준위도 선별위원회 회부 통보를 받았다. 심 준위는 최근 폐막한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쓰러진 80대 노인을 발견해 즉각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등 국민을 살려낸 미담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도 계엄 당시 ‘여론조사 꽃’ 확보 임무가 부여된 방첩사 ‘4팀’이었던 까닭에 선별위원회 회부를 피하지 못했다.

당시 방첩사는 윤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명령 계통에 따라 선관위 관련 기관(1∼3팀) 및 ‘꽃’(4팀) 확보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대령 이하 부대원 중에 이 명령을 그대로 이행한 사람은 없었다. 심 준위 등 4인은 ‘꽃’(서울 서대문구) 대신 용산가족공원 주차장으로 가 버티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부대로 복귀했다. 유 대령 역시 ‘꽃’ 대신 반포한강공원 일대 공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양 중령도 선관위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배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부대원들도 부대 인근 편의점에서 커피 등을 마시며 시간을 끄는 동시에 계엄 가담으로 의심받을 것에 대비해 편의점 폐쇄회로(CC)TV에 얼굴을 일부러 노출했다. 당시 “임무 수행 거부 시 항명죄로 처벌된다”는 지시가 하달됐는데, ‘출동하는 척’으로 항명죄를 피하면서도 부대 복귀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명령을 이행하지 않기 위해 택한 ‘회색 지대’가 편의점과 주차장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전술적 지연 행위’로 저항했지만 더 강하게 위헌적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일단 부대 밖으로 나간 행위는 출동으로 간주됐다. 여기에 방첩사 전신인 전두환 소장의 국군보안사령부 시절부터 누적돼 온 반민주적 통치 동원의 ‘조직사적 원죄’와 사령관이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를 받는 ‘오너 리스크’가 더해지면서 부대원들은 궁지에 몰렸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14일 국무회의에서 “특히 인사에 있어서 (내란) 가담 정도가 극히 경미하더라도 가담·부역 사실이 확인되면 승진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한 만큼 이들이 ‘편의점 저항선’을 구축했다고 해도 불이익을 피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가 방위와 국민 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군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위기 타개용이나 분풀이용으로 동원해 사지로 내몬 장본인이 사과는커녕 조소로 답해선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군인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와 법정에서마저도 여전한 특권의식과 거만함, 군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모습은 나르시시스트라는 평가를 떠올리게 한다. 계엄 여파로 평생 몸담은 부대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게 된 데다 ‘준법정신 없는 장교’라는 낙인이 찍힌 군인의 마지막 호소에 가해자가 조소로 답할 이유는 없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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