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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참여 내세워 빈틈 노린다… 세계 제일의 ‘기업사냥꾼’[이준일의 세상을 바꾼 금융인들]

입력 | 2025-11-10 23:09:00

칼 아이컨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1940년대 미국 뉴욕 맨해튼 건너 퀸스의 중하층 동네에 아주 똑똑한 아들을 둔 유대인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에 분노했다. 소수의 부자들이 막대한 부를 누리는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린다고 여겼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유대교 지도자가 사립학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으나 부부는 학교를 방문한 뒤 부유한 이들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자신들과 맞지 않는다며 거절하고 아들을 공립학교에 남길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우리 아들은 의사예요”라는 중산층 유대인의 깊은 염원이 있었다. 안정된 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인 의사가 되는 것만이 아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진로였다. 아들은 프린스턴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바람대로 뉴욕대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의대는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고, 2년 만에 학교를 떠나 군대에 입대함으로써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다. 훗날 ‘기업 사냥꾼’으로서 “이기는 것과 돈 버는 것이 좋다”고 말한 아이컨 엔터프라이즈의 칼 아이컨 의장(1936∼)의 출발이다.

아이컨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타깃 삼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지분을 사들인 뒤 경영진에게 지배구조 개선, 자사주 매입, 배당금 확대, 구조조정 등을 요구했다. 1980년대에는 시장에서 저평가된 기업이나 대주주가 없어 지분이 분산된 기업을 상대로 경영권 공세를 벌인 뒤 높은 가격에 되팔아 차익을 거두는 그린메일(green mail) 수법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1985년 TWA(Trans World Airlines) 사건은 단기 이익 추구를 위해 기업을 해친 ‘악성 투기자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아이컨은 TWA를 적대적으로 인수한 뒤 자금 회수를 위해 런던 노선과 항공기를 비롯한 쓸 만한 자산을 팔아치웠다. 막대한 채무를 안게 된 TWA는 결국 1992년 파산했다.

이후 그린메일 규제 등이 강화되면서 아이컨은 자산 해체(asset stripping)로 얻은 ‘공공의 적’ 이미지를 벗고 주주 행동주의자로 변모했다. 우수한 사업을 보유하고도 무능한 경영진이나 비핵심 사업의 존재 등으로 인해 저평가된 기업이 행동주의의 대상이다. 아이컨은 2023년 세계 1위 유전자 분석기기 제조사 ‘일루미나’의 최고경영자(CEO)를 물러나게 했다. 미국과 유럽 규제당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과거 분사시킨 자회사 ‘그레일’을 4배 가격에 되사는 인수를 강행해 주주들에게 500억 달러(약 72조 원)의 손실을 입혔다면서, 지분 매입 발표와 함께 CEO 및 이사 교체를 위한 위임장 대결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2006년 2월 KT&G 주주총회에서 한국인삼공사(현 KGC인삼공사)의 분리 상장, 유휴 부동산 매각,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하며 경영진과 맞섰다. 8월 KT&G가 아이컨의 제안을 반영한 주주환원 계획을 발표해 주가가 상승하자 아이컨은 12월 주식을 처분해 열 달 만에 1500억 원의 차익을 거두고 떠났다. ‘먹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아이컨의 활동으로 KT&G의 기업가치가 상승해 많은 주주들이 혜택을 본 것도 사실이다. 가치를 높이는 데 힘쓰지 않는 기업들은 언제라도 아이컨의 타깃이 될 수 있다.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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