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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Win, Baby!(그냥 이겨!)” 낸시 펠로시 전 미국 연방하원의장(민주당)은 선거에 나선 후배 정치인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출마했으면 어떻게든 이기고 보라는 전투적 격려였다. 펠로시 본인의 정치 인생이 그랬다. 자녀 5명을 둔 전업주부로 살다 47세에 늦깎이로 정계에 입문한 펠로시가 이후 하원에서 근 40년 동안 내리 20선을 한 비결이기도 하다. 그는 유리천장도 모자라 ‘대리석 천장’으로 불릴 만큼 남성 중심인 미 의회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여성 하원의장이었고, 그것도 두 번(2007∼2011년, 2019∼2023년)이나 했다.
▷펠로시의 야성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맞짱으로 주목받았다. 트럼프 1기에 대통령 탄핵안이 2차례나 하원을 통과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게 펠로시였다. 2020년 국정연설 중이던 트럼프 바로 뒤에서 펠로시가 보란 듯이 대통령 연설문을 북북 찢어버리는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펠로시는 “연설문이 거짓투성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여러 선택지 가운데 그나마 예의 바른 대응이었다”고 했다.
▷당시 트럼프의 과격한 정책들이 실현되지 않은 건 백악관 내 ‘어른들의 축’과 함께 펠로시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펠로시는 요즘도 관세 폭탄을 남발하고 초강경 이민 정책을 펴는 트럼프를 향해 “지구상 최악의 존재”라며 날을 세우고 있다. 물론 가만히 있을 트럼프는 아니다. “미친 낸시” “형편없고 역겨운 여자” 같은 원색적 비난을 수시로 한다. 수천억 원대 자산가인 펠로시를 향해 “아르마니를 입은 좌파”라고 비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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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는 펠로시의 은퇴 선언에 대해 “기쁘다”면서 “그는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안긴 사악한 여자”라고 했다. 아무리 앙숙이어도 40년 의원 생활을 마감하는 마당에 덕담을 건넬 법도 하지만 트럼프가 끝까지 악담을 퍼부은 건 펠로시를 혐오하는 지지층을 염두에 둔 측면도 있다. 이제 펠로시가 은퇴하면 예전처럼 트럼프를 몰아세우긴 어려워질 것이다. 트럼프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던 워싱턴 ‘센 언니’의 존재감이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