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휴 가천대 길병원 교수(56·심장혈관흉부외과)는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 트렌스제주 100마일(160km)에 출전해 36시간 만에 완주했다.다. 그는 지난해부터 트레일러닝에서 함께 뛰며 다치거나 위험에 빠진 러너들을 돕는 ‘레이스 메딕(Race Medic)’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싫은 게 운동이었고,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도 보지 않았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가?.
최창휴 교수가 인천 가천대 길병원 근처 승학산에서 ‘레이스 메딕’이란 완장을 가리키고 있다. 운동 문외한이던 최 교수는 자전거와 마라톤에 이어 트레일러닝에 빠져 산을 달리다 다친 대회 참가자들을 돕는 레이스 메딕으로 활약하고 있다. 레이스 메딕은 응급처치 키트를 차고 달려야 한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약 15년 전 잠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적이 있어요. 캐나다로 가족들과 함께 연수 갔는데 돌아올 시점에 아이들이 남겠다고 했죠. 쉬는 날 할 일이 없다 보니 너무 지루해서 집에 있던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서 삶이 바뀌었죠. 이명박 정부가 4대강에 길을 잘 만들어 놓아 전국 어디든 자전거 타고 갈 수 있었죠. 서울~부산 종주는 물론 4대강 등 전국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죠.”
최 교수가 자전거를 열심히 타자 자연스럽게 소문이 났고, 대학 자전거동아리 학생들이 지도교수를 해달라고 했다. 학생들과 주기적으로 라이딩하다 인천 송도에서 열리는 듀애슬론(사이클 40km, 마라톤 10km)에 나가게 됐다. 그는 “자전거와 달리기는 완전히 달랐다. 500m나 1km는 달리겠는데 5km 넘으면 힘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마라톤을 공부하며 달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201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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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휴 교수(왼쪽 앞)가 한 트레일러닝대회에서 레이스 메딕 활동하다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최창휴 교수 제공.
“로드 마라톤에 흥미가 떨어질 때쯤 지인이 산을 달리는 트레일러닝이 있다는 겁니다. ‘도로 달리기도 싫은데 무슨 산을 달리냐?’고 했죠. 그 친구가 산 달리기가 더 재밌다고 강조했죠. 그래서 모든 러너들의 성지 서울 남산으로 가서 달려봤죠. 정말 색다른 느낌이었죠. 올라갈수록 풍광이 좋았어요. 산에선 달리는 주로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다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긴장감이 좋습니다. 오르막을 오를 땐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와 꽃, 개울, 바위 등 자연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최창휴 교수가 한 트레일러닝대회에서 스틱을 들고 달리고 있다. 최창휴 교수 제공.
최 교수는 장거리를 선호한다.
“산 장거리 100km 이상을 달릴 땐 상승고도와 거리를 감안해 체력 안배도 잘해야 합니다. 전 체력을 60~70%만 쓰려고 노력합니다. 주말 이후에는 또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너무 피곤한 상태가 되면 곤란합니다. 저에게 기록은 의미 없습니다. 그냥 즐겁게 달립니다. 제가 100km 이상에 자주 나가는데 생각해 보면 제 일도 비슷합니다. 수술 한번 들어가면 최소 6시간입니다. 많게는 10시간 넘게 걸리죠. 수술하기 전 환자 상태를 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위험 요소를 제거합니다. 트레일러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리기 전 코스를 유심히 분석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위험한 구간은 대회 전 직접 가서 달려보기도 합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출전합니다.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최창휴 교수가 겨울에 열린 트레일러닝대회에서 질주하고 있다. 최창휴 교수 제공.
“제 개인적인 성향에도 맞습니다. 저는 짧은 시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보다는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트레일러닝을 20시간 정도 달리면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지지만 정신도 맑아집니다. 산에서 바짝 긴장하며 20시간 동안 달려보세요. 그럼, 직업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확 날아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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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러너들이 크고 작은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봤죠. 가벼운 찰과상과 골절 등 외상성 손상부터 탈진, 심혈관 이상 등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도 있습니다. 최근 한 대회에선 30대가 심정지로 사망했습니다. 레이스 중간 각 CP(Check Point)에 응급요원들이 있지만 산길에선 바로 투입이 쉽지 않아 참가자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제가 달리는 대회에서는 대회 주최 측과 협의해 레이스 메딕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혼자선 안 되겠다 싶어 올해부터는 달리는 의사들을 모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최창휴 교수가 한 트레일러닝대회에서 꽃이 핀 산을 오르고 있다. 최창휴 교수 제공.
“외상성 손상은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지만 체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 현상은 참가자들이 모를 수가 있어요. 과도하게 땀을 너무 많이 흘려 탈진 상태가 된다든가, 열이 너무 올라간다든가, 너무 물을 많이 마셔서 저 나트륨 혈중 상태가 온다든가. 평상시에는 괜찮지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컨디션에 따라 호흡곤란이나 쇼크가 와 쓰러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필요합니다. 세계 대회에 나가면 의사들이 트레일러닝대회를 기획 단계부터 개입해 안전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모든 대회에 그런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레이스 메딕은 대회 스태프가 아니고 참가자이면서 응급 상황엔 러너들을 돕는 순수 자원봉사자다. 레이스 메딕으로 봉사키 위해선 중급 이상의 트레일런 완주 경험이 있어야 한다. 최 교수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레이스 메딕 자원봉사자들을 모았다. 현재 약 20명이 활동한다. 대회 땐 10명에서 15명의 의료진(의사 한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 산악구조대 소방공무원 등)이 간단한 기본 의료 장비를 메고 달리며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는 무전을 받으면 최근 거리에 있는 레이스 메딕이 뛰어가 돕는다. 올해는 경기 동두천 코리아 50K 등 4개 대회에서 시범 운영하며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최창휴 교수가 인천 가천대 길병원 근처 승학산에서 응급처치 키트 등을 지닌 채 질주하며 환호하고 있다. 운동 문외한이던 최 교수는 자전거와 마라톤에 이어 트레일러닝에 빠져 산을 달리다 다친 대회 참가자들을 돕는 레이스 메딕으로 활약하고 있다. 인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최 교수는 “레이스 메딕이 참가자들에게 ‘주변에 의사들이 달리고 있구나’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도 있다. 향후 더 많은 의료진을 모아 함께 달리며 러너들의 안심하고 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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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휴 교수가 차고 달리는 응급처치 키트. 최창휴 교수 제공.
인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