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백악관에서 만난 스톨텐베르그(왼쪽)와 트럼프. 사진 출처 나토 홈페이지
책은 속기록을 읽는 듯한 생생한 대화에 더해 스톨텐베르그의 솔직한 감상이 담겨 호평을 얻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교류가 단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달 말 영문판 출간을 앞두고 영국 가디언을 통해 공개한 발췌본을 살펴봤다.
● 트럼프 깜짝 승리에 ‘대응 모드’로 전환
스톨텐베르그는 정치인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외무장관, 국방장관, 주유엔대사 등을 지낸 노동당 중진이었다. 그 역시 기자와 공무원으로 잠시 일한 뒤 32세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광고 로드중
다음날 오전 5시 기상하자마자 그는 CNN 보도를 본 그는 ‘트럼프 승리 유력’이라는 기사가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6시 동료들과 조찬 자리에서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트럼프가 유세 기간 나토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나토 수장으로서 트럼프와 최대한 빨리 좋은 업무 관계를 쌓아야 했다. 그와 참모들이 나토에 대해 보다 좋은 인상을 가지게 해야 했다.”
스톨텐베르그는 트럼프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직원들 입단속부터 시작했다. 트럼프를 조롱하고 비웃는 인식이 퍼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혹여나 워싱턴으로 ‘나토가 트럼프를 우습게 생각한다’는 소식이 흘러갈까 우려했다.
● 새 미국 대통령과의 색다른 첫면담
스톨텐베르그는 나토 사무총장으로 10년(2014~2024년)간 재임하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조 바이든 전 대통령까지 세 명의 미국 대통령과 합을 맞췄다. 광고 로드중
20분간의 일대일 대화는 묘하게 엇갈리며 중구난방으로 흘렀다. 트럼프가 “나토도 북한 문제에 동참하면 안 되냐”고 묻자, 스톨텐베르그는 뜻을 짐작할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미군이 공격을 받아 나토가 자동개입한 아프가니스탄전처럼 북한에도 개입할 수 있느냐는 의미였다.
2019년 4월 백악관에서 만난 스톨텐베르그(왼쪽)와 트럼프. 사진 출처 나토 홈페이지
미델파르트는 트럼프와 몇 차례 데이트했던 노르웨이 재벌 후계자다. 트럼프가 뉴욕의 클럽에서 멜라니아 여사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날, 그와 동행했던 여성이기도 하다.
“좋은 여자입니다. 당시 노르웨이 신문에서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썼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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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좋게 보도됐습니다. 지금은 노르웨이 부자랑 결혼했어요.”
“그는 돈이 많지 않아요.”
트럼프가 미델파르트의 남편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톨텐베르그는 깨달았다. 수천억 원대 자산가도 트럼프의 눈에는 부자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 마커로 수정한 연설문
다음달 둘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났다. 트럼프는 새로 지은 나토 본부를 보며 “이렇게 큰 건물이 정말 필요하냐”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뭘 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트럼프 인터네셔널 호텔을 만든 건축가들이 나토 본부도 설계했다고 알려주자 “그 비싼 건축가들? 대체 왜 그렇게 비싼 사람들을 쓴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꼬집었다고 한다.
연설 차례가 되자 트럼프는 테러의 위협을 경고한 뒤 나토 회원국 방위비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토 28개 회원국 중 23개국이 약속한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고 있다. 미국인들에게 공평하지 않다.”
연설을 하면 할수록 스톨텐베르그가 전날 건네받은 연설문과 달랐다. 슬쩍 보니 일부 문장은 지워졌고, 굵은 검은색 마커로 몇 가지 키워드가 적혀 있었다. ‘(돈을) 내야 한다(MUST PAY)’ ‘불공평하다(NOT FAIR)’ ‘2%가 하한선이다!’
● 워싱턴에서 걸려온 경고 전화
임기 첫해에 트럼프는 파리기후협약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을 선언했다. 방위비 압박은 이듬해 더욱 거세졌다. 나토 정상회담을 보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트럼프가 갑자기 전화 통화를 요청하자 스톨텐베르그는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통화에서 방위비 인상을 요구했다. 특히 독일에 대한 불만이 컸다. 얼마 전 가졌던 안젤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와 백악관 회담을 언급했다.
“제가 ‘안젤라, (독일은 방위비로) 2%를 써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아마도 2030년엔 달성할 거예요’라고 답하더군요. 웃으면서요. 웃었단 말입니다!”
2018년 5월 백악관에서 회담을 가진 스톨텐베르그와 트럼프. 사진 출처 나토 홈페이지
이 말을 듣자 불길한 걱정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스톨텐베르그를 휘감았다. 미국이 발을 빼면 나토의 생명줄이 끊길 수 있었다.
그는 곧 마르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헤이그에서 만났다. 어떻게 트럼프를 설득해 나토에 남게 할지 작전 회의를 했다. 둘은 트럼프 취임 후 1년간 나토 회원국이 330억 달러의 국방비 추가 지출을 약속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회의장을 떠나겠다. 내가 남을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2018년 7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당장’ 인상하라는 압박을 쏟아냈다. 미국의 대유럽연합(EU) 무역 적자, 유럽의 개방적 이민 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곁들였다. 새 나토 본부를 두고는 “탱크에서 한발만 쏴도 이 건물은 무너질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분위기는 얼어붙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메르켈이 일어나 스톨텐베르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대응해야 합니다. 이대로 지나갈 순 없어요.”
짧은 쉬는 시간에 트럼프는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고, 방 한켠에서는 스톨텐베르크가 메르켈과 뤼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머리를 맞대고 긴급 회의를 했다. 이들의 참모들도 사방에 전화를 돌리며 동분서주했다.
회의가 재개되자 트럼프는 더욱 세게 나왔다. 독일이랑 미국이 같은 금액을 내지 않는다면 나토를 탈퇴하겠다고 했다.
“회의장을 떠나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상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스톨텐베르그의 머릿속에는 ‘오늘 70년 역사의 나토가 망가진 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메르켈이 반박하자 트럼프는 회원국을 한곳씩 호명하며 GDP 대비 국방비를 읊었다. 이런 식이었다. “크로아티아, 아,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믿기지 않네요. 1.26%. 기분이 정말 끔찍하겠어요.”
● 트럼프 마음에 쏙 든 ‘330억 달러’
스톨텐베르그는 준비한 설득 카드를 꺼내들었다. 뤼터였다. “대통령님, 방위비를 증액하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정확히 그러고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는 당신의 리더십 때문에 방위비로 330억 달러를 더 썼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죠.”
트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스톨텐베르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가지런한 필체로 “사무총장님, 저 덕분에 나토 회원국이 방위비를 대폭 증액했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드디어 실마리가 보였다. 스톨텐베르그는 마이크를 잡고 트럼프의 쪽지를 그대로 읽은 뒤 회의를 조기 종료했다.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릴 돌발상황을 막고 싶었다.
회의가 끝난 뒤에는 트럼프의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스톨텐베르그는 긴장 속에서 지켜봤다.
“나토에 대한 미국의 헌신은 매우 강력합니다. 회원국들의 기개와 더 많은 국방비를 쓰겠다는 의지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앞으로 최소 330억 달러를 더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단합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 스톨텐베르그의 외교술
스톨텐베르그는 최근 또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올 2월 요나스 가르 스퇴레 총리의 요청을 받아 재무장관으로 복귀했다. 지난달에는 그가 속한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트럼프와 관계도 좋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스톨텐베르그의 연임을 요청했고, 2기 취임식 때도 그를 초대했다. 최근에도 관세 협상을 위해 소통하고 있다. 현지 언론 DN 보도에 따르면 7월 회의 때는 트럼프가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가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지난달 소속 노동당이 노르웨이 총선에서 승리한 스톨텐베르그. 오슬로=AP 뉴시스
그날의 아첨에 대해 후회는 없을까. 출간을 앞두고 진행한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에서 스톨텐베르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혀요.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가 실제로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를 담아 신중히 선택한 표현이었습니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