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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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이란 큰 산을 넘은 뒤 돌이켜 생각하니 이런 막무가내 협상이 어디 있나 싶다. 뒷골목에 끌려가 양쪽 호주머니 탈탈 털렸는데 그래도 남들보단 덜 뜯겼다고, 양말 속에 숨겨둔 돈은 지켰다고 안도해야 하는 처지가 씁쓸하다. 미 백악관이 공개한 단체 기념사진은 상징적이다. 한미 각각 5명씩 10명이 ‘엄지 척’을 하고 있는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등 3명, 모두 미국 측이다.
미국에선 원팀, 돌아오니 남남
한국 협상 대표단은 “전쟁과 같은 협상 과정” “피가 마른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했다. 수틀리면 “그냥 관세 25%로 가자”며 자리를 박차는 미국 측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야 했다. 다행히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카드 등을 앞세워 물꼬를 텄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 재계도 총출동해 힘을 보탰다.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 관세 협상 과정에서 정부·여당과 기업은 ‘원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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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가 타국을 바라보는 태도와 더불어민주당이 기업들을 대하는 방식은 묘하게 닮아 있다. 핵심 지지세력의 이익이 우선이다. 트럼프에게 ‘미국’과 ‘백인’이 중심이라면, 한국엔 ‘개미’와 ‘노조’가 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상대가 입을 타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관세가 자유무역을 위축시키고 결국 소비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기업 경영이 위축되면 경제 성장이 어려워진다” 같은 교과서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
피 말리는 기업 심정도 알아주길
한편으론 잦은 변주로 ‘희망고문’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때론 “나는 관대하다”며 양보할 듯했지만 사실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호적인 협상 분위기에 방심하던 인도와 스위스가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기업이 성장의 중심’이라며 스킨십을 확대하는 정부·여당에 경제계는 ‘혹시나’ 하고 기대를 걸었지만 ‘역시나’였다. 6월 30일 민주당은 경제단체들과 상법 개정안 간담회를 갖고는 사흘 뒤에 바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달 14일에도 노란봉투법과 관련해 경제단체들의 우려를 경청한 뒤 다음 날 “늦어도 내달 처리”를 공언했다.
관세 25%가 15%로 되니 뭔가 이득을 본 것 같지만, 기업들 입장에선 0%에서 15%로 부담이 커진 것이다. 2분기 사상 최대 매출을 거두고도 영업이익은 급락한 현대차·기아처럼 하반기 전 산업을 강타할 관세 폭풍의 여파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권 불안과 자금 경색(상법), 노사 관계 불안(노란봉투법), 비용 증가(법인세) 등까지 한꺼번에 얻어맞으면 웬만한 기업은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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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