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나라 위한 얼과 글’전 안동 명문가서 태어나 만주로 망명 군정부 조직해 서로군정서로 개편 군자금 영수증-독립군 총기류 전시… 유공자 11명 배출 임청각 역사도 소개
일제 강점 뒤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가족, 친척과 만주로 망명한 석주 이상룡 선생. 정통 유학자로 이름이 났던 그는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며 근대 정치사상을 받아들였고,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임청각 제공
1911년 1월 27일 53세의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식솔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수레로 건너며 이렇게 읊었다(‘도강·渡江’). 그의 뒤엔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 앞에는 서간도가 있었다.
고향집인 경북 안동의 임청각을 출발(1월 5일)하기 전날, 석주 선생은 “잘 있거라 고향 동산아, 슬퍼하지 말자. 난리 그친 밝은 새날 돌아오리니”(‘거국음·去國吟’)라고 읊었지만, 끝내 ‘새날’을 보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던 그의 유해는 중국 하얼빈에 안장돼 있다가 1990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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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광복 80주년 특별전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석주 이상룡 선생의 글 ‘도강’을 서예가 이동익 씨가 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안동 명문가에서 태어난 석주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조직했고, 1908년에도 병사를 일으키려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원래 성리학자였던 그는 이런 좌절을 거치며 서양 근대사상과 민주공화 지향을 받아들이는 한편, 계몽운동에 나서며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주도했다. 이번 전시에선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는 내용이 담긴 협회의 취지서를 볼 수 있다.
만주로 망명한 뒤엔 1911년 애국지사들과 함께 지린성 삼원보에 모여 한민족 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책임을 맡았다. 이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고, 이듬해엔 경학사의 이념을 계승한 부민단을 조직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는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를 조직해 서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1925년 9월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대 수반이자 국무령으로 추대됐다.
경북 안동시 임청각의 오늘날 모습. 이건형 씨(고성 이씨 문중) 제공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4일 전시 개막사에서 “석주 이상룡은 임청각의 종손으로서 편히 살 수 있었음에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라며 “오늘날의 한국을 있게 한 주인공을 기리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도 축사에서 “(사람들을) 갈라치지 않고 통합해 이끈 지도자였기에 만주에서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독립운동 세력은 좌우 갈등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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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