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사당 추정… 건물 반환은 처음 日 우익 반대 막혀 국내로 못돌아와 기와-단청 다채로워 학술 가치 우수 정확한 원래 위치는 조사 더 필요해
1920년대 이후 일본 가마쿠라의 사찰로 옮겨져 기도처(❶)로 사용됐던 ‘관월당’은 지난해 6월부터 해체 작업(❷)을 거친 뒤 국내로 옮겨졌다. 국가유산청 제공
‘관월당’은 18, 19세기 대군(大君)급 왕족의 사당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단청 등에 쓰인 무늬는 매우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증명한다. 지난해 현지에서 해체된 뒤 부자재 형태로 수장고에 보관돼 있는 관월당은 아직 ‘원위치’가 밝혀지지 않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용과 박쥐 새겨진 왕실 관련 건축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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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등에 따르면 관월당은 1900년대 초 순정효황후(순종의 비) 아버지인 윤택영의 소유였으나, 그가 막대한 빚을 지며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식산은행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24년 재정난을 겪던 조선식산은행이 고건축에 관심 많던 야마이치증권 초대 사장인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에게 넘기며 관월당은 일본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경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도쿄 메구로(目黑) 자택으로 관월당을 가져간 스기노가 폐병에 걸린 뒤 고토쿠인 옆에 별장을 지으며 다시 옮겨 세웠고, 1934∼1936년경 고토쿠인에 기증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관월당’으로 불린 건 고토쿠인으로 옮겨진 뒤부터였다고 한다. 현지에선 최근까지 관음보살상을 봉안한 기도처로 활용됐다.
관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정면을 제외한 모든 칸에 화방벽(火防壁·불타지 않는 재료로 만든 벽)이 설치됐고, 구조와 규모가 조선의 사묘(祠廟) 양식을 띠고 있다. 다만 학계는 건물이 타지를 떠도는 동안 구조가 일부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분석 결과, 현 기단은 일본 가나가와현과 도치기현에서 채석되는 안산암과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와와 단청에 새겨진 다채로운 무늬는 관월당이 조선 왕실과 연관된 건물임을 뒷받침한다. 암막새엔 용과 박쥐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단청엔 구름과 만(卍)자 무늬 등이 있다. 손현숙 동아시아전통미술연구소장은 “단청은 19세기 후반 다시 채색된 것으로 보인다”며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채색된 초기 단청과 비교 연구하면 왕실 건축 단청의 변화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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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월당은 1990년대 학계와 불교계를 통해 존재가 알려진 뒤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유산’으로 꾸준히 거론됐다. 2010년 양국 불교계가 협의하며 한국으로 돌아올 뻔했으나, 일본 우익의 반발 등으로 논란이 커지며 환수가 불발됐다.
이후 2019년 고토쿠인 주지인 사토 다카오 게이오대 교수(민족학고고학)가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에 “제국주의 시대 반출된 문화유산의 귀환을 바란다”며 기증을 제안했다. 이후 팬데믹을 거치며 시일이 늦어졌으나, 건물 해체 및 이전 비용도 모두 고토쿠인 측이 부담했다. 앞서 도쿄 오쿠라 호텔에 있던 경복궁 자선당의 유구가 반환된 적은 있으나, 건물 전체가 돌아온 건 처음이다.
기와와 석재, 목재 부재가 순차적으로 들어와 경기 파주시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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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