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회사 밖에서 취미가 비슷해 서로 인사를 나눴던 이모 씨를 얼마 전 만났다. 여럿이 모여 차를 마시는 자리였는데 유독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 치매를 앓고 계신 노모를 모시느라 근심이 많았었지만, 그날은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웠다. 곧바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순식간이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듣고 보니 스미싱 피해를 본 이야기였다. 문자에 포함된 링크를 누른 뒤 수천만 원이 휘리릭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는 “도무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박식하기로 소문난 그였기에 다들 당황했다.
평상시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는 안타까움을 더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수년 전 직장을 떠난 뒤 거의 쉬지 않고 일만 해왔다. 주차장에서 발레파킹을 하거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장의 책임을 묵묵히 감내했다. 과거 대기업에 몸담았던 경력을 내려놓은 지도 오래였다. 한 푼이 아쉬운 그의 형편이 더욱 팍팍해질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광고 로드중
결과는 참담했다. 불과 몇 달 만에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단순 계산해도 창업에 들어간 자금은 나의 4년 치 생활비를 훌쩍 넘겼다. 사업이라는 게 실지 운영하면서 늘어나는 비용이 상당히 많았다. 예상치 못한 항목들이 자꾸 생기는 바람에 지출은 예산을 항상 초과했다. 반면에 들어오는 수입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직접 해보니 창업은 퇴직자가 로망이나 차선책으로 덤벼들기엔 큰코다치기 딱 알맞은 상대였다.
벌어도 시원찮은데 큰돈을 잃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실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가게에 갔는데 사장님이 갑자기 주식 얘기를 꺼냈다. 주식 투자는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며 본인은 3년째 공부 중이라고 했다. 워낙 확신에 차 있던 터라 나도 모르게 혹하고 빨려 들어갔다. 사장님이 종이에 적어 준 회사 이름을 보물처럼 받아 들었다.
며칠 뒤 크게 망설이지 않고 추천받은 종목을 샀다. 모르는 기업이었지만 일단은 적은 금액으로 테스트만 해 볼 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가가 단기간에 급등했다.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데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다 넣으세요.” 순간 솔깃해져 소위 영혼까지 끌어다 여윳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내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누군가 주식은 묻어두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버텨낼 힘이 없었다.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퇴직 후 자금 관리에서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세 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보이스피싱 등 각종 금융 사기 △충분한 정보 없이 뛰어드는 ‘묻지 마’ 투자 △준비되지 않은 무리한 창업이다. 이것은 모두 퇴직자의 자산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지뢰와도 같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수십 년간 모은 돈을 앗아가 버리기도 하고, 남은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광고 로드중
나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지 않으려면 버려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착각이다. 재정적으로 한순간에 주저앉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내 재산을 보호하는 첫걸음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스스로를 과신하는 퇴직자에게 경제적 안전지대란 없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