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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불순한 어휘로 여겨졌다. 산업혁명, 교통혁명 같은 표현도 조심스럽게 써야 했다. 1980년대에는 ‘민중’이 반(半)금지어였다. 당시에는 영화 상영 전에 ‘문화영화’라는 이름의 계몽 영상을 틀었다. 그때 군사정권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려고 수많은 국난에서 나라를 지켜온 사람은 백성들이었다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영상을 상영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중이라는 표현은 꺼려졌는지 어색하게 ‘민’이라고만 했다. 차라리 ‘백성’이나 ‘국민’이라는 말을 쓰면 됐을 것을, 두 단어는 구식이거나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요즘에는 ‘시민’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도 있다. ‘민주시민’이라며 대상을 한정 짓기도 한다. 민중 역시 민중의식을 지닌 사람만 민중이라는 괴상한 정의를 들이댄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 때, 상황을 직접 보겠다며 전선에 나온 한 장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지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8월의 무더위 속, 고지를 뒤덮은 시신들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신마다 ‘부자’ ‘가난뱅이’ ‘도시민’ ‘시골사람’ ‘육체노동자’ ‘인텔리겐차’ 같은 표식을 붙였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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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사회이고, 나라다. 비록 부조리와 불합리가 있더라도, 모두의 생명과 자유로운 삶이라는 가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한 이들의 영혼이 모여 있는 날이 현충일이고, 그것이 바로 이 붉은 날의 교훈이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