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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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국에서 담배 회사가 흡연 피해를 배상하라는 첫 ‘담배 소송’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의학 수준은 담배와 질병 발생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판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후 유사한 소송이 이어졌지만 1980년대까지 미국 법원은 담배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황이 달라진 건 담배 회사 내부 문건이 공개되면서다.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더 강한 중독성을 위해 니코틴 함량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내부 고발 등으로 알려지자 판도가 바뀌었다. 1994년 미국 미시시피주가 시작한 의료비 반환 소송에 나머지 49개 주가 동참해 담배업계를 압박했다. 담배 회사들은 불리한 판결이 예상되자 주 정부에 25년간 총 2460억 달러(약 337조 원)를 내는 것으로 서둘러 합의했다.
한국도 유사한 소송이 진행 중이다. 2014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 회사 3곳(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 최후 변론이 22일 마무리됐다. 장기간 흡연 후 폐암, 후두암 진단을 받은 환자 3465명에게 지급한 진료비 533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이다. 2020년 1심에서 “가족력 등 암을 발생시킨 다른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패소하자 공단은 흡연 외 암 발생 요인이 없는 1467명을 추려냈다. 30년 이상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소세포폐암 발병 위험이 54배 이상 높고, 흡연의 질병 기여도가 98% 이상이라는 최신 연구 결과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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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흡연은 개인 선택’이라는 담배 업계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니코틴 중독성을 애써 감추고, 책임을 모면해 온 담배 업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의견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금연 실패가 결코 의지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승룡 고려대 구로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기호식품은 중독성이 거의 없다. 담배는 끊었을 때 불안과 불면 등 금단 증세에 시달린다. 중독성이 강한 ‘유해 물질’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직접 흡연으로 인한 추정 사망자(2019년 기준)는 5만8036명에 이른다. 이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비용도 연간 12조1913억 원으로 추산된다. 건강보험 재정에서도 매년 3조 원 이상이 나간다. 이 돈은 흡연자뿐 아니라 비흡연자도 함께 부담한다.
담배 회사는 이런 흡연의 폐해에 대해 오랜 기간 사실상 면죄부를 받아 왔다. 소비자를 기망해 온 담배 회사 탓에 중독마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문화가 형성됐다. 안전한 담배, 중독되지 않는 담배는 없다. 담배 회사는 지금도 다양한 맛과 향의 신종 담배로 미래 흡연자를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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