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택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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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전 헌법재판소가 내놓은 결정으로 법조계가 술렁인 적이 있다. 성폭력 피해 미성년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재판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성폭력처벌법 조항이 위헌이라는 내용이다. 결국 어린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2차 피해’ 우려가 제기됐다. 그럼에도 헌재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녹화 과정에서 피고인 측이 반대신문을 할 수 없으므로 “방어권 제한의 정도가 매우 중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만큼 한국의 사법체계에서는 방어권을 중시한다.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 등이 방어권의 구체적 내용이다. 방어권이 강조되다 보면 수사와 재판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권리를 우선시한다는 지적이 나올 소지도 있다. 하지만 “공정한 형사절차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이고, 이에 대한 이견은 찾아보기 어렵다.
체포 거부도, 재판 지연도 ‘방어권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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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 측은 요즘엔 헌재가 탄핵심판 변론기일을 한꺼번에 지정한 것 등을 방어권 침해라고 주장하며 피청구인으로서의 방어권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헌재가 탄핵심판에서 적법 절차를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며 가세했다. 이럴 만큼 윤 대통령의 방어권은 취약한가.
윤 대통령은 고위직 전관 출신을 포함한 대규모 변호인단의 조력, 여당과 대통령실의 지원 사격 등 겹겹이 보호를 받으면서 체포 적부심, 구속 취소 청구 등 다양한 제도를 꼼꼼하게 활용하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찰의 출석 요구 거부, 체포 뒤에도 진술 거부 등 피의자의 권리를 넘치도록 행사했다. 헌재에서도 윤 대통령이 의견을 밝히는 데 별 제약이 없다. 그래도 부족하다고만 한다.
권력자 아닌 약자를 지키는 방패 돼야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측의 방어권 주장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이 대표 역시 변호인단과 민주당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다. 공직선거법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소송서류를 송달받지 않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아 항소심을 늦췄다. 그럼에도 “정당한 방어권 행사”라며 1심 판결의 근거가 된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대권 가도에 차질이 없도록 항소심 선고를 늦춰 보겠다는 게 속내일 텐데, 이를 방어권으로 포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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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변호인을 구할 능력도, 법률 지식도 부족해 꼭 필요한 방어권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힘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느낄 박탈감을 생각해서라도 여야 정치 지도자와 그를 돕는 이들이 함부로 방어권을 입에 담지 말았으면 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