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적인 개표 부정 확인된 적 없는데도 대통령은 증거 없이 주장-유튜버는 확산 사회적 신뢰 위협하는 음모론 타협 안 돼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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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 음모론이라는 역병이 결국 내 주변까지 왔다. 알고 지내던 변호사님 한 분이 부정선거론에 빠져들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선관위 직원 중에 중국 간첩이 99명 있다’, ‘노벨상 수상감인 형상기억종이로 가짜 투표지를 만들었다’ 같은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 그뿐이랴. 이런 저급한 음모론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존재하리라고도 믿지 않았다. 내 안의 엘리트주의까지 솔직히 고백해 말하자면, 대통령이 주장한 여러 계엄 선포 사유 중 다른 것은 몰라도 부정선거 음모론만은, 그 자신도 믿지는 않는 말로 우매한 군중을 자극하려는 얄팍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법조인들은 기본적으로 법과 질서를 신뢰하고, 보수적인 성향이고, 증거주의에 입각한 사고를 장기간 훈련, 반복한다. 법조인 출신 대통령이 증거 없는 음모론에 심취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당선자가 아닌가. 선거의 당선자가 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은 동기론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지나치게 비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멀쩡해 보이던 지인이 갑자기 중국인 간첩과 선관위 서버 해킹을 주장하자, 나는 아득해졌다. 설마 우리나라 현직 대통령, 변호사인 그의 대리인단, 일부 여당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도 지지율을 위한 선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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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기표-개표 시스템하에서 가짜 투표지 수천 장이 투표지 안에 들어가려면, 선거 준비부터 개표까지 전 과정에 거대한 선거 조작 세력, 국가공권력보다 훨씬 강대하고 철저하고 비밀스러운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이 서로 공모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 정도의 자본과 권력을 가진 조직이 실존한다면 애써 부정선거를 하는 것보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 훨씬 효율적이리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중국인 간첩설이 나온다. 선관위 등에 비밀스럽게 투입된 중국 간첩이 부정선거에 필요한 이 모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 가짜뉴스가 외국인 혐오, 중국 혐오임은 명백하다. 근거도 없다. 가짜뉴스에 사용된 사진은 10여 년 전 불법조업 중 체포된 중국 선원들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중국이 부정선거로 한국 정치에 개입을 시도하리라는 발상은 너무나 민주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해 다소 우스꽝스럽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 우리 국익을 침해하는 중국 간첩이 있더라도 99명이 선거연수원에 모여 부정선거를 획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비효율적인 첩보 활동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이 부정선거 음모론은 스케일도 굉장히 크다. 중국 간첩단의 부정선거 획책에 동원됐다는 한국 선관위는 세계 곳곳의 부정선거를 야기했다고 한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낙선한 것도 더불어민주당과 한국 선관위의 부정선거 조작 때문이란다. 우리 선관위, 중국 간첩, 야당은 계엄령이 선포된 작년 12월 3일에도 콩고 대선 투표를 부정선거로 조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전 세계에 혼란을 야기하고 민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선관위가 마치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 같은 역할이라는 것이다.
신문을 탐독하는 독자들은 이 정도로 황당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음모론을 믿지 않을 정도의 판단력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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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신뢰를 좀먹고 합리적 사고를 무너뜨리는 이 음모론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상식과 질서를 믿어야 한다. 터무니없는 주장은 무시해야 한다. 음모론이라는 역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