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 사회가 온다] 〈1〉 노인 경제력이 국가 활력 가른다 日-佛 등 초고령사회 맞은 선진국… 고수익 공적연금에 사적연금 탄탄 “일할 때보다 도리어 형편 나아져”… 美작년 지출 22%가 65세이상 노인 연금으로 크루즈 여행 여유 누리고… 재취업-창업 등 경제활동도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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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동부 억필드에 거주하는 맬컴 마케시 씨(83)는 농부로 일하다가 2006년에 은퇴했다. 은퇴 전엔 매일 소젖을 짜며 농사일을 했던 그지만 은퇴 후엔 네덜란드, 스위스,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 여행을 즐긴다. 마케시 씨는 “일할 때는 저소득층에 속했지만 지금은 연금 덕분에 도리어 형편이 나아져 중산층에 해당할 것”이라고 자랑했다.
마케시 씨는 한 달에 2400파운드(약 425만 원) 정도의 연금을 받고 있다. 국가연금이 그중 65%를 차지하고 있고 개인연금 17%, 퇴직연금은 10% 정도다. 나머지 8%는 세상을 떠난 마케시 씨의 아내가 고용주로부터 받았을 연금의 절반이다.
마케시 씨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국가연금에 조금씩이라도 항상 추가로 납입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며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한두 개 갖고 있다. 소득세를 피하면서 수익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영국 노동연금부가 관리하는 국가퇴직연금신탁(NEST)은 2012년 디폴트 옵션을 의무화했다. NEST 가입자의 99%가 디폴트 옵션에 가입하고 있는데 연평균 수익률은 8∼9%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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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2025년은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 ‘원년’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장수 국가인 일본은 고령사회(노인 14% 이상)에서 초고령사회로 오기까지 10년이 걸렸고 프랑스는 39년이 걸렸지만 우리나라는 고령사회가 된 2018년부터 불과 7년 만에 초고령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내년 1965년생을 시작으로 954만 명 규모의 ‘2차 베이비부머’들이 10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은퇴 수순을 밟는다.
문제는 기록적인 고령화 속도와 달리 노년층의 은퇴 후에 대한 준비는 미진하기만 하다는 점이다.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소득절벽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는 이유다.
준비 없는 초고령화로 신음하는 우리와 달리 선진국은 두둑한 연금을 바탕으로 고령층이 활발한 소비와 경제 활동에 나서는 추세다. 정부가 잘 운용해온 공적연금뿐만 아니라 사적연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재취업 시장도 탄탄한 덕이다.
덕분에 노인들은 선진국 경제의 ‘비밀 무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따르면 70세 이상 미국인은 현재 총 가계자산의 약 26%를 보유하고 있다. 연금 부자도 많다. 미국 최대 퇴직연금 자산운용사 피델리티는 올해 2분기(4∼6월) 말 기준 자사 401K(미국 퇴직연금제도) 가입자 중 계좌에 100만 달러(약 14억 원) 이상의 잔액을 가진 가입자가 49만7000명으로 사상 최대치라고 밝혔다. 이 같은 자산을 바탕으로 노인들은 거침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 지난해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소비자 지출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은 총지출의 약 22%를 담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7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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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경우에도 연구조사평가 및 통계위원회(DREES)에 따르면 2024년 월 4000유로(약 590만 원) 이상의 연금을 받는 은퇴자가 약 7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전체 연금 수급자 1700만 명 중 4.4%가량이다.
60대 창업은 녹록지 않았다. 현직에서 잘 알던 지인들은 이미 퇴직해 고객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부동산 경기가 나쁘면 아예 수입이 ‘0유로’인 달도 있었다. 전기료 등 고정 비용만 나가 적자를 볼 때도 허다했다. 퐁생 씨는 “그래도 든든한 연금보험금이 3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창업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적연금에 일반 퇴직연금과 고위 임원용 퇴직연금까지 3곳에 ‘연금 파이프라인’을 뚫어놨던 것. 3곳에서 들어오는 연금 수입은 현재 월평균 6000유로(약 882만 원)에 달한다. 그는 ‘3중 연금’ 덕에 어린 두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었다.
연금을 든든한 발판 삼아 사업도 키울 수 있다. 퐁생 씨의 지금 소득은 퇴직 전의 60%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제 두 아이는 훌쩍 자라 독립을 앞두고 있지만 그는 계속 일할 계획이다. 퐁생 씨는 “일하는 게 재밌어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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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씨가 은퇴 후에도 자녀, 손주를 챙길 수 있는 이유는 호주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과 노령연금이 생활을 든든하게 받쳐주기 때문이다. 하워드 씨는 매달 4000호주달러(약 360만 원)의 퇴직연금과 노령연금을 받고 있다. 집의 일부 공간을 렌트하며 월 600호주달러(약 54만 원) 정도 추가 수입도 거둔다.
‘슈퍼’(최고)라는 이름을 내건 호주 퇴직연금 슈퍼애뉴에이션은 1992년부터 근로자 가입이 의무화됐는데 연간 수익률 8%대, 지난해엔 수익률 9%대를 기록했다. 맡겨두면 두둑한 연금자산을 누릴 수 있는 호주의 노인들은 “퇴직연금을 중도에 인출해 쓰는 건 인생이 끝장난 사람이나 할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워드 씨도 “교사로 근무했을 때 월급의 10%는 퇴직연금에 넣었다”며 “지금은 월요일마다 친구들과 모여 노래를 부르고 주민들에게 1시간 반 동안 미술을 가르치면서 만족스러운 은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도 사회 담당 강사로 재취업해 경제활동을 이어나가는 시노미야 씨는 은퇴 전보다 월급(현재 17만 엔·약 159만 원)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노후가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는 “정규직 담임 교사로 일할 때와 비교하면 책임이 줄어든 데다 학부모들과 부딪칠 일이 없고, 휴일도 많아졌다”며 “여유가 생긴 덕분에 웃는 얼굴로 학생들을 대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누구의 할머니, 아내보다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밖에 나가서 일할 때가 재미있어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특별취재팀▽팀장=장윤정 경제부 차장 yunjung@donga.com
▽호주=송혜미, 네덜란드·독일=강우석,
일본=신무경, 영국=김수연 기자
뉴욕=임우선, 파리=조은아 특파원
서울=전주영 이동훈 조응형 신아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