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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의 무비홀릭]똥과 기생수

입력 | 2024-04-22 23:39:00

영화 ‘오키쿠와 세계’. 두 청년이 똥을 통해 순환경제의 섭리를 실현한다. 엣나인필름 제공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세상에나! 얼마 전 ‘똥’이 주인공인 일본 영화를 보았어요.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오키쿠와 세계’인데, 무슨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 같은 제목이지만 90분 내내 똥을 푸지게 감상할 수 있어요(다행히 대부분 흑백 영상이에요). 19세기 일본 에도시대가 배경. 가난뱅이 두 청년 야스케와 츄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의 변소에 넘쳐나는 똥을 사 모은 뒤(제품 원가)→산 넘고 물 건너 시골 농촌으로 운반하여(물류)→약간 더 높은 값에 비료로 팔아(이익 실현) 근근이 먹고살아요.

일자무식에다 몸에선 똥내가 진동한다며 벌레 취급을 당하지만, 알고 보면 이들은 세상을 구원하고 이치에 따라 작동하게 만드는 구세주일지 모른다는 게 영화의 탁월한 시선이에요. 청년들은 도시의 똥을 치움으로써 지속가능한 거주 환경을 유지시켜 주는 한편 이 똥을 음식의 재료인 농작물을 쑥쑥 자라나게 만드는 비료로 재활용함으로써 21세기적 순환경제와 ESG 경영을 실천하고 있었으니까요.

싸는 것은 먹는 것이 되고 먹는 것은 싸는 것이 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 무한 루프가 세계의 작동 원리라는 깨달음이죠. “이놈이나 저놈이나 위로 먹고 밑으로 싸는 건 똑같아”라는 야스케의 일갈에선 만민평등주의와 사해동포주의의 스멜까지 느껴진다고요. 똥 비료에 강물을 살짝 섞어 무게를 늘림으로써 더 많은 돈을 받으려 하는 야스케의 얍삽한 행각에선 단말마 같은 기업가정신과 창조경제도 겹친다니까요?

맞아요. 똥과 음식의 순환. 돌고 도는 순환(Circulation)을 통해 영화는 ‘세계(世界)’라고 하는, 근대화를 앞둔 당시 일본인들이 숙명적으로 만나게 될 거대하고 두려우면서도 모호한 대상을 한마디로 정리해 버려요.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저쪽을 향해서 가면 결국 이쪽에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요.

아, 죄송! 똥과 해학으로 철철 넘치는 재미난 영화를 너무 어렵게만 해석했네요. 그래서 이번엔 어려운 영화를 더 어렵게 해석해 볼게요. 일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최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작이에요. 그래요. 은유와 상징이 사무치는, 평론가들이 입 털기 딱 좋은 영화죠.

개발이 안 된 자연친화적 시골 마을에 돌연 글램핑장을 짓겠다며 도시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벌어지는 일. 마을을 대표하는 타쿠미라는 남자는 “그럼 사슴들은 어디로 갈까?” 걱정하는데, 결국 남자의 무시무시한 변화가 깜짝 놀랄 반전을 만들어 내요(너무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이지만 힘겹게 참겠어요. 이 반전이야말로 지루한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유일한 ‘사건’이니까요). 일단 이 영화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제목이 다하는 영화예요. 애당초 세상에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진짜 위험은 균형(Balance)이 무너질 때라는 주장이죠.

예를 들어 볼게요. 개구리에겐 천적인 뱀이 악이죠? 하지만 뱀에겐 생사탕(生蛇湯)을 먹는 인간이 악이죠. 결국 선악이란 실존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선악이라 분류하고 일컫는 것들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가 최악의 악이고 진짜 종말의 시작이라고 영화는 알려줘요. 그래서 주인공 타쿠미는 시종 ‘못’ 하는 수준의 연기를 넘어서 ‘안’ 하는 수준의 무표정 연기로 일관하는데, 이는 그가 세상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자구 행위도 서슴지 않는 대자연 혹은 가이아(대지의 여신)로서의 지구를 상징하는 존재로 설정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맞아요. 세상의 본질은 밸런스예요. 프라이드 반 양념 반도 밸런스, 톰과 제리도 밸런스, 이스라엘과 이란도 밸런스, 에일리언과 프레데터도 밸런스, 바이든과 트럼프도 밸런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도 밸런스, 먹으니까 싼다도 오직 밸런스죠.

이런 뜻에서 일본 영화 ‘기생수’에 등장하는 괴수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봐야겠다는 미친 생각이 들어요. 우주에서 포자 형태로 지구로 떨어진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이 인간 몸을 숙주 삼아 무시무시한 촉수 괴물로 변신해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 이유가 뭘까요? 인구 폭증으로 지구에 ‘독’으로만 작용할 뿐인 인간의 숫자를 10분의 1로 줄임으로써 지구 균형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외로 설득력 넘치고 간절한 의도였다고요! 그래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넷플릭스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는 태생부터 난센스라고 생각돼요. 합계출산율 0.6명으로 인구 소멸을 향해 광속 질주 중인 작금의 대한민국에 기생수들의 수고(?)가 굳이 필요할까 말이에요. 극강의 빈부격차, 인플레이션, 사교육비, 대출 금리야말로 기생수보다 100배 흉측한 식인 괴수라니까요.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