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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러, 이번엔 한인회장 지낸 교민 ‘30년 입국금지’… 사유는 “기밀”

입력 | 2024-04-18 03:00:00

러서 22년 체류 60대 여성 사업가
“탈북민 지원도 안했는데 내쫓겨”
선교사 체포 이어 추방 등 잇달아
대러 제재에 보복조치 본격화 우려




러시아 한 지역의 한인회장을 지낸 이모 씨(60)가 최근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30년 입국 금지’ 처분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러시아 측은 이 씨의 추방 사유와 관련해 ‘국가 기밀’이라고만 했을 뿐, 당사자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에도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22년 가까이 거주한 이 씨는 범죄 혐의 등으로 조사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앞서 한국인 선교사 백모 씨를 올해 초 체포해 아직 구금 중이다. 올해 들어 우리 교민들을 상대로 비자 연장 거절 등 불이익을 주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러 관계가 악화되면서 교민들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보복 조치가 본격화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 30년 입국 금지… ‘국가 기밀’ 짤막한 설명만

국내에 체류 중인 이 씨에 따르면 그는 주재원으로 파견된 남편을 따라 2003년부터 러시아에서 약 22년을 살았다. 그동안 국내를 오가며 비자를 받거나, 3∼5년 단위로 임시 영주권인 ‘거주 허가증’을 발급받아 현지에서 체류했다. 남편이 다닌 회사가 러시아에서 철수한 뒤에도 부부는 러시아에서 한국 의료기기를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교민사회에서 뿌리를 내린 이 씨는 지역 한인회장도 맡았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문제는 이 씨가 지난해 러시아 이민국에 영주권을 신청하면서 불거졌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러시아 이민국으로부터 “영주권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것. 그는 처분에 불복해 현지에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임시 영주권도 패소 판결 이후 자동 취소됐다. 이 씨는 “영주권 발급이 불허된 이유에 대해 ‘국가 기밀’이라는 것 외에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러시아에 가족과 집, 회사가 있는 이 씨는 지난해 12월 러시아 체류 비자를 다시 발급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남편이 가족을 초청하는 형태로 비자는 새로 발급받았다. 하지만 이 씨는 지난달 1일 러시아 공항에 도착해 자신이 입국 거부 상태인 사실을 알게 됐다. 러시아 이민국으로부터 받은 ‘입국 금지 서류’에는 입국 거부 사유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단지 “러시아연방에 2054년 1월 16일까지 입국할 수 없다”는 내용만 짤막하게 담겼다.

이 씨에 대한 입국 금지와 관련해 우리 정부 고위 소식통도 “러시아 당국이 정확한 입국 금지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이 씨가 현지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은 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러시아 당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탈북민을 지원한 적도 전혀 없었다”며 “20년 넘게 청춘을 바친 곳에서 갑자기 이유도 모르고 내쫓겼다”고 했다. 또 “집도 못 팔고 송금도 못 하는 신세”라고도 했다.

● 러 교민 상대 영주권 박탈, 추방 등 잇따라

러시아가 우리 교민에게 30년 입국 금지 처분을 내린 건 매우 이례적이다. 러시아는 탈북민을 구출하려던 선교사들을 적발해도 통상 5년 내지 10년가량 입국 금지만 해왔다.

최근 러시아에 거주 중인 다른 일부 교민들은 발급받은 비자에 적힌 방문 목적과 실제 러시아에서의 활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교민 4명은 러시아 입국 과정에서 방문 목적 확인을 명분으로 공항에 억류돼 1∼4시간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국제사회의 대(對)러 수출 통제 공조 차원에서 무기로 쓰일 위험이 있는 682개 품목을 수출 통제 대상으로 추가했다. 이에 러시아는 보복 조치를 예고했다. 이달 초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를 위반한 러시아 법인·개인 등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자 러시아는 “대한민국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런 만큼 러시아가 한국의 대러 제재 등을 막기 위한 외교적 압박용으로 우리 교민들을 상대로 보복 조치에 나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 소식통은 “우리가 러시아를 제재하고 있고, 러시아는 우리를 비우호국으로 지정했기에 (한-러 간) 환경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북-러 관계가 크게 밀착하면서 우리 교민들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통제가 강화된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