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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챙겨주고 병원도 같이 가”…쪽방촌 주민 ‘아들’ 된 사장님 [따만사]

입력 | 2024-02-08 12:00:00

동행식당 ‘옛촌’ 사장 홍영기·박성순 씨 부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식당 ‘옛촌’ 사장 홍영기 씨(왼쪽)와 박성순 씨. 2024.1.25.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삼촌 천천히 먹고 가!” “앉아서 뜨뜻한 커피 한잔해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식당 ‘옛촌’ 사장 홍영기 씨와 박성순 씨는 문을 여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말을 걸며 안부를 묻는다. 손님의 이름과 식성, 건강 상태까지 모두 기억하는 홍 씨 부부는 손님마다 ‘맞춤형 메뉴’를 내놓는다.

이곳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동행식당’이다. 시는 ‘약자와의 동행’ 프로젝트 중 하나로, 2022년 8월부터 쪽방촌 주민에게 하루 한 끼 8000원 상당의 식권을 제공한다. 주민들은 인근의 동행식당을 찾아 식사한다.

‘옛촌’ 앞에 붙여져 있는 동행식당 문구. 2024.1.25.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주민들이 매일 기존의 8000원짜리 메뉴만 먹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홍 씨 부부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홍 씨는 “요즘엔 날이 추우니까 떡국이나 황태해장국, 여름엔 시원하게 냉면이나 국수를 드린다. 그날마다 먹고 싶은 것을 말씀해 주시면 만들어 드린다”고 했다.

명절에는 쓸쓸히 홀로 보낼 주민들을 위해 따로 음식을 준비한다. 육전과 갈비, 떡과 달걀 등을 명절 선물로 나눈다.

홍 씨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연로해 직접 식당에 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매일 음식을 들고 쪽방촌으로 향한다. 그는 “제가 배달을 안 가면 큰일난다. 그분들은 하루를 굶으셔야 한다”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입맛이 없거나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하는 주민에게는 죽을 끓여 대접한다.

‘옛촌’ 메뉴. 홍 씨와 박 씨는 쪽방촌 주민들에게 메뉴판에 적혀있지 않은 음식도 대접한다. 2024.1.25.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홍 씨는 주민들의 보호자 역할도 한다. 배달을 간 그는 “할머니”라고 외치며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자, 할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였다. 놀란 홍 씨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보호자가 동행해야 한다는 119구급대원의 말에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홍 씨는 “당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다. 감기도 걸리시고 식사도 잘 못하셔서 누룽지 죽을 많이 쒀다 드렸다”며 “지금은 조금 괜찮아지셨다”고 했다.

홍 씨는 창신동쪽방상담소를 통해 할머니의 병원비를 지원했다. 지난달부턴 매월 상담소에 5만 원씩 후원금을 내고 있다.

평일에는 쪽방상담소 직원들이 주민 건강을 살피지만,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홍 씨가 나선다. 근처 약국이 모두 문을 닫은 일요일, 홍 씨는 할머니에게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까지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결국 문 연 약국을 찾아서 할머니와 약사분 간 전화 연결해 드렸다”고 설명했다.

홍 씨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아내 박 씨는 “할머니가 정말 고맙다며 옷 한 벌을 선물로 주시더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홍 씨도 “할머니랑 같이 눈물을 흘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옛촌’ 사장 박성순 씨(왼쪽)와 홍영기 씨. 2024.1.25.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주민들은 끼니를 챙겨줄 뿐 아니라 말벗이 돼주는 홍 씨 부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는 “추운데 고생하네”라며 잠자리 곁에 둔 사탕 5개 중 2개를 배달 온 홍 씨에게 건넸다. 목도리, 모자, 장갑 등 식당 한켠에는 추운 날 배달 가는 홍 씨를 위한 주민들의 따뜻함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주민들은 “어젠 힘들었지만 오늘 밥 먹고 좋아졌다” “배고팠는데 밥 잘 먹었다” “배달시켜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홍 씨는 “주로 혼자 사시니까 외로우셔서 자꾸 말을 거시는 데 그걸 끊고 뒤돌기 쉽지 않다”면서도 “식구들과 티격태격 재미있게 대화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행복이다. 고맙다고 해주시면 정말 좋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인터뷰 내내 쪽방촌 주민들을 ‘우리 식구’라고 칭했다. 주민들은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삼촌’ ‘이모’라고 불러주는 홍 씨 덕에 따뜻함을 느낀다. 홍 씨는 이렇듯 주민들의 ‘사회복지사’이자 ‘아들’이다.

식당은 동네 ‘사랑방’으로 변했다. 주민들은 오다가다 식당에 들러 커피를 마시거나 회포를 푼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멸치 똥을 따기도 한다. 김나나 창신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은 “주민들이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니까 식당에 와서 이야기하고 재료 손질도 같이한다”며 “몸이 불편하지 않은 분들은 직접 식사하러 식당에 와야 하기에 오히려 집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집에선 혼자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여기 오면 다른 주민과 말하며 식사할 수 있으니 외로움이 줄어든다”고 했다.

홍 씨도 새로운 식구가 늘어 좋다며 “동행식당이 식구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동행식당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며 “식당이 잘 안되시는 사장님들은 동행식당 참여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주민분들과 서로 상생하는 관계인 것 같다”고 했다.

‘옛촌’의 모습. 2024.1.25. 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

김 실장에 따르면 동행식당 모집 공고는 전년도 12월 쪽방상담소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상담소 측에서 근처 식당에 동행식당 모집 관련 안내문도 돌린다. 모집 후 설명회를 가진 뒤 선호도 투표를 통해 동행식당이 선정된다. 이후 매년 재계약하는 구조다.

동행식당에 참여한 지 2년 차인 홍 씨는 “제가 아니라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인터뷰 내내 겸손해했다. 그는 “저희 건강이 허락돼서 식당을 운영할 때까지는 동행식당에 참여하고 싶다. 그때까지 우리 식구들과 건강하게 웃으면서 보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이혜원 동아닷컴 기자 hyewon@donga.com